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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eon Aug 09. 2023

I just wanna be a rockstar

삶을 한 편의 영화에 비유하는 건 조금 불공평합니다. 아무래도 영화는 세상의 가장 극적인 장면들을 모아서 편집한 것이고, 실제 인생에는 그보다 훨씬 지루한 순간들이 많으니까요. 제가 하는 연구라는 일 역시 '극적'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멉니다. 물론 내 가설을 증명할 핵심적인 데이터나, 기대하지 않았던 흥미로운 결과를 얻는 순간은 짜릿합니다. 언젠가 제가 쓴 논문이 출판되는 날이나, 큰 학회에서 발표를 하는 일도 나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겠지요. 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이 되기에는 조금 심심합니다. 아마 제가 영화 주인공이 되려면 세계를 구해내는 백신이나 인류를 위협하는 괴물 정도는 만들어내야 할 겁니다. 물론 제가 대학원생이라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거지, 세상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은 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각기 다르지만 평범한 삶을 살아갑니다.



한국에서 어릴 때 공부를 잘 하면 잠시 주인공과 같은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는 그 나이대의 아이가 가질 수 있는 다른 좋은 능력과 자질들에 비해서 특별히 과한 칭찬과 사랑을 받고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는 제 삶이 평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제는 제 삶이 그렇게 특별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앞으로도 돈을 대단히 많이 벌 것 같지도, 인류사에 대단한 업적을 세우게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삶에서 뭐 그리 대단한 걸 기대하겠냐마는, 자라면서 수없이 들어온 장밋빛 미래와는 좀 대조되는 게 사실입니다. 아직 졸업이 적어도 3년은 남았다고 말할 때 한숨을 내쉬는 아빠를 보면, 그럴거면 어릴 때는 뭐하러 날 그렇게 자랑했냐고 따져 보고 싶기도 합니다. 공부를 조금 덜 시켰으면 진작에 취업도 하고 집에 용돈도 부쳐드리고 했을 텐데 말이죠. 열심히 살다 보니 자연히 불효자가 되는 억울함을 이해해줄 사람은 같은 대학원생들 뿐인 듯합니다.



그렇다고 뭐 제 삶에 크게 불만은 없습니다. 연구도 재미있고, 사랑하는 애인과 좋은 친구들도 있고, 적당한 취미생활도 있으니까 사실 정말 괜찮은 삶입니다. 여기에 평범하다는 딱지를 붙이는 건 기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평범하다는 말을 영화로 만들 만큼은 아니라는 정도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럭저럭 큰 불만 없이 살다가도, 가끔은 정말 밝게 빛나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냥, 삶이 갑갑한 날이 있잖아요. 그런 날은 조금 슬퍼지면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나를 꿈꿔보게 됩니다. 그럴 때 가장 많이 하는 건 락스타가 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수천, 수만 명이 모인 공연장 무대에서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멋지게 연주하는 상상을 합니다. 빛나는 그 순간에 열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한가운데 있다면 얼마나 짜릿할까요. 그럴 때면 제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시도해 볼 수 있는 한 번의 삶이 더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농담으로 한 열 번 정도를 바랐는데, 이제는 부디 한 번만이라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작곡동아리에서 만난 친구입니다. 우연히 제 곡의 보컬을 부탁했다가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제 곡을 같이 몇 번 녹음했었는데, 그 친구는 작사 작곡도 잘 하고, 그림도 잘 그립니다. 몇 번 보고 나면 그 안에 진짜 재능이 충만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졸업을 준비하면서 동아리를 그만뒀는데, 그 친구는 동아리에서 밴드를 결성해서 계속 작업을 이어가더니 앨범을 내고 데뷔를 했습니다. 그런가보다 하고 잊어버렸다가 어느날, 문득 앨범을 찾아 들었는데, 노래가 너무 좋아서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그 친구가 제 곡을 불러줬다는 걸 어디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제 곡이 부끄러워서 딱히 그러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노래도 가사도 목소리도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정도로 부러웠습니다. 그 순간에 그 친구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 친구는 제가 그런 생각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만요.



학부생 때는 저도 그렇게 작곡동아리도 하고 밴드도 했지만, 무대에 서는 일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나름대로는 진지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친구들과 재미있게 노는 일에 더 가까웠습니다. 공연도 즐거웠지만, 전반적으로는 겨우겨우 연주를 해내는 데 급급할 때가 많았습니다. 돌아보면 기타를 좀 더 열심히 칠 걸 하는 후회가 듭니다. 그래서 어디가서 나 그래도 기타 좀 칠 줄 알아,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는 열심히 할 걸 그랬다고. 지금 제 기타는 동생이 전부 가져갔습니다. 동생은 저보다 훨씬 밴드에 진심이라서, 기타도 열심히 치고 공연도 정말 많이 합니다. 얼마전에는 멋진 옷과 머리를 하고 무대에서 무릎을 꿇고 기타를 휘갈기는 영상을 올렸습니다. 그 때, 살면서 처음으로 동생이 진짜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동생한테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래도 동생이 행복해 보여서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제 기타를 저보다 훨씬 잘 써줘서 왠지 고마웠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부러워한 것은 무대에 선다는 사실 자체는 아닙니다. 제가 갖고 싶은 건 영화와 같은 한 순간일겁니다. 그 장면의 배경이 꼭 사람들이 잔뜩 모인 무대여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길거리, 작은 바, 바닷가, 아니면 아늑한 집이라도 괜찮겠지요. 관객 역시 많아도, 적어도, 단 한 명이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재주와 마음으로, 한 순간 자신을 불태워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물론 그런 순간이 노력 없이 얻어질 리는 없고, 저에게는 대단한 노력을 할 여유도 의지도 부족하지만, 로망을 가질 수는 있는 거니까요. 내 미래의 삶의 모양이 정해져갈수록, 나와 멀어지는 다른 가능성들이 아련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봅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면, 그건 그 때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시절이었기 때문일겁니다. 물론, 슬픈 일이지만 나는 결국 하나의 나밖에 될 수 없습니다. 후회 없는 삶은 혹여 있을 지 몰라도, 아쉬움 없는 삶이란 없습니다.



저는 예전보다 락을 덜 듣고, 부드러운 노래들을 훨씬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낮에 여유가 있어 커피를 내릴때는 보사노바를 틀고, 저녁에는 재즈나 시티팝을 종종 듣습니다. 그래도 기타를 조금씩 치기는 하는데, 요즘 방에서 깨작깨작 연습하는 곡은 리사 오노의 <I Wish You Love> 입니다. 역시 락스타와 어울리는 곡은 아니지만, 통기타 한 대만 있는 자취방에서 혼자 연습하기에는 이런 곡이 적당합니다. 이렇게 변한 플레이리스트가 좀더 지루해지고 안정된 제 생활과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날이 좋은 출퇴근길에는 종종 밴드 노래를 듣습니다. 카이스트에 와서 그런건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건지 요즘은 페퍼톤스가 그렇게 좋더라구요.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페퍼톤스의 <FAST>를 공연하는 게 버킷리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렉기타도 다시 하나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자전거를 타고 5집 <HIGH-FIVE>를 들으며 그들도 다녔을 학교를 향해 갑천을 건너면 사십 먹은 아저씨 둘이 제 로망을 대신 실현해주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이렇게 누가 누군가의 팬이 되는건가 싶어요. 글을 쓰다보니 더 늦기 전에 페퍼톤스의 공연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뷰티풀 민트 라이프 티켓을 사버렸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 길에서 지나치는 사람들, 지금 ktx 제 옆자리 창가에 기대 잠든 아저씨도 가끔씩은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평생을 단발이었던 엄마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커다란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질주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다들 때로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화려하고 밝게 빛나는 한 순간을 각자 마음에 품고 있을까요. 지금까지 선택해온 인생에 후회는 없지만, 만약 인생이 한 순간만을 위해 사는 것이라면, 나는 분명 락스타가 되고 싶어요.



23.03.21 글쓰기 모임에서.



And we're all getting older wishin' we were young

우리는 젊어지기를 소망하며 계속 늙어가고 있어


Hangin' on the memory of what we would become

우리가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하던 기억에 매달려


Singin' "ah ha ha, I was born to be a rockstar"

노래하며, 나는 록스타가 되기 위해 태어났어


Singin' "ah ha ha, I just wanna be a rockstar"

노래하며, 나는 그저 락스타가 되고 싶어!


A Great Big World - <Rock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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