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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eon Jan 08. 2024

동거보다 여행

지극히 개인적인 홍콩 여행 후기

결혼하기 전에 동거를 해 봐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물론 같이 생활하며 드러나는 사소한 습관의 차이가 큰 갈등이 될 수도 있고, 동거로 그런 부분을 먼저 맞춰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으로서, 내게 그런 사소한 것은 정말 '사소한' 것이다. 양말과 수건을 같이 빨지 따로 빨지, 설거지를 그때그때 할지 모아서 할지 따위는 내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물론 내가 해 오던 방식은 있지만, 상대가 원하는 방식이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대신에 삶이 하나의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나 같은 유형의 인간이라면, 누군가와 오랫동안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지는 여행을 같이 해 보면 더 빨리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장소에서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생각하는 건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인생을 어떻게 채워나갈지를 고민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사실 나는 이번 여행이 애인이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란 걸 깨닫는 시간이 될까봐 조금 두려웠다.


우리는 두 번의 연말을 지리산 자락의 구례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내일이 크리스마스라는 걸 알 수 있게 해 주는 건 게스트하우스와 가게의 소박한 장식들과 마을 입구 로타리에 세워진 커다랗고 촌스러운 트리 정도였다. 사실은 그런 시골은 평소 내 취향의 여행지는 아니었다. 시골 풍경은 명절 할머니 집에 내려갈 때마다 보는 것이고, 나는 도시의 번쩍거리는 불빛과 사람들을 구경하는 걸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삐걱거리는 자전거를 빌려서 섬진강을 달렸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오산에 올랐고,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보석같은 가게들을 찾아냈다.


그러나 우리가 첫 해외여행지로 선택한 홍콩은 사정이 달랐다. 시끄러운 것과 줄 서는 것을 싫어하는 ISTP 애인을 데리고 크리스마스에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에 가는 게 맞는지를 비행기를 예약하고 나서도 고민했다. 출퇴근길 지하철에 이미 충분히 시달린 애인이 홍콩의 인파에 금방 지쳐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저 영화일 뿐이지만 중경삼림과 화양연화를 나만큼 재밌어하지 않는 것도 은근히 신경쓰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네이선 로드


다행히도 모든 걱정은 기우였다. 애인은 나보다도 부지런하고 힘찬 여행자였다. 둘째 날부터 완전히 틀어진 계획에도 (마카오로 가는 배편이 매진이었다) 우리는 홍콩을 마음껏 쏘다녔다. 헤리티지 1881을 구경하고 트럭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침사추이 중심의 어떤 쇼핑몰에 들어갔다. 볼만한 가게들은 아래층에서 다 구경했지만 우리는 한 층 위에 무엇이 있나 하는 궁금증에 계속해서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이제 슬슬 내려가도 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할 때쯤 도달한 7층 복도에서, 그녀는 갑자기 나를 멈추게 하고 앞서가더니 뒤돌아서 내 사진을 찍었다. 나도 뒤를 돌아보았다. 널찍한 복도는 텅 비어있었고, 햇살이 들어오는 유리벽 밖으로 청킹맨션의 모습이 보였다. 구룡반도의 가장 번잡하고 유명한 건물을 가장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가이드북엔 나올 리 없는 마법같은 장소였다.



다시 혼잡한 거리로 내려와 실제로 들어가본 청킹맨션의 1층 아케이드는 듣던 대로 마경이었다. 온갖 국적의 사람과 음식들이 뒤섞여 묘한 공기가 감돌았고, 성능을 알 수 없는 휴대폰과 짝퉁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건물의 상가가 아닌 저녁의 시장 골목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금발 가발을 쓴 임청하가 여전히 밤중에 뛰어다닐 것 같은 1층과는 다르게 청킹맨션의 지하는 요즘 젊은이들이 다닐 법한 몰로 나름 꾸며져 있었다.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파는 크리스마스 플리마켓도 준비중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놀랍게도 인생네컷이 있었는데,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 사악한 가격에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대신 애인의 눈길을 끈 것은 자판기에서 파는 일회용 필름카메라였다. 그걸 사자는 제안에 나는 마음속으로 조금 망설였는데, 그건 아마 실행취소가 없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거다. 손편지도 컴퓨터로 다 쓴 다음 옮겨적기만 하는 나라는 인간에게 필름카메라는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런 면에서 애인은 나보다 훨씬 용감한 모험가였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배경을 선정하고, 과감하게 셔터를 눌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덩달아 편해졌다. 뭘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사진 몇 장이 망해도 그것 역시 추억일 텐데.


우리는 계속 즉흥적으로 계획을 수정하고, 결정한 후에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눈길이 가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멈춰섰다. 침사추이 쇼핑몰의 7층 복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홍콩 곳곳에서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 방식은 우리가 지리산 기슭 시골에서 했던 것과도 다르지 않았다. 단지 배경이 홍콩이라는 빽빽한 도시로 바뀐 것 뿐이었다. 그런 방식의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의 축소판과 같았다.


우연히 들른 카페 창밖으로 본 영화 촬영 현장


하고싶은 것, 보고싶은 것, 먹고싶은 것이 미리 정해져 있는 여행도 있을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가는 삶의 방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방식은 보물찾기다. 보물의 위치를 알고 시작하는 보물찾기는 없다. 대략적인 지도만을 들고 발길 닫는 대로 모험하는 것이다. 삶의 여러 선택들에 대해서 단 한번도 크게 후회한 적이 없다. 항상 최선의 선택을 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택한 길에서 새롭게 발견한 보물들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그저 합리화를 잘 하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차피 인생은 반복 불가능한 로그라이크 게임과 같다. 내가 고른 선택지대로 진행하면서 최대한을 얻어내면 그만이다. 그 길에 나와 비슷하지만 다른, 또 하나의 눈과 마음이 함께한다면 더 많은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필름 인화를 기다리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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