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건
박 태 건
그날이 오면 비닐봉투를 산다
비닐봉투에는 무엇이든 넣을 수 있으니까
술과 말린 꽃과 그리고
행복했던 추억 몇 장,
술을 따라놓고 생각에 잠기다
참, 술을 못 드시잖아!
그보다 나이가 많아진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며
그가 좋아했던 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각자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떠올렸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질 때까지 이야기했다
그래도 남은 것은 비닐봉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와서
비닐봉투를 머리에 썼다 다행이야!
비닐봉투엔 언제든 넣을 수 있으니까
몸이 젖을수록, 머리가 뜨거워져서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닐봉투가 있으므로 구겨진 채로
어디든 살 수 있을 거라고
아무 것도 아니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검정 비닐봉투가 움직인다
이 시의 제목은 비닐봉투다. 너무나 많이 사용하고 자주 접하며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라 시의 소재로 쓰인 것이 새롭다. 시인은 그날이 오면 술과 말린 꽃 그리고 그것들을 담을 비닐봉투를 산다. 비닐봉투엔 무엇이 든 넣을 수 있기에 행복했던 추억도 몇 장 넣는다. 그날은 아마도 시인이 소중히 생각했던 사람의 기일이리라. 세상을 떠난 소중한 이는 죽음으로 나이가 멈춰 버렸지만 살아있음으로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은 그보다 더 나이가 많아져버렸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생일이 돌아오듯 떠난 사람의 기일이 돌아오고 우리들은 모여 앉아 그가 좋아했던 음식이며, 평소의 그의 습관이며, 그와의 잊을 수 없는 일화들을 각자 '최대한' 떠올려 이야기한다. 하루 하루 생을 쳇바퀴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도 사실 마주 앉아 이야기하다 보면 화제가 끊어지기 마련인데, 돌아가신 분과의 추억을 매년 기일마다 새기고 또 새김질하여 이야기하다 보면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고, 작년에 했던 이야기고, 많이 들었던 이야기일지라도 우리는 '최대한' 그를 위해 각자의 경험 주머니를 뒤지고 열어본다.
비닐봉투에 담았던 '행복했던 추억 몇 장'이 다 사라질 즈음,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헤어지기 싫지만 헤어져야 하고,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소중한 사람 앞에서 시인은 인사를 한다. 또 다시 내년의 기일을 기약하며 무덤 앞을 떠나는 시인은 비닐봉투를 머리에 썼다.
이 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들은 '그날' 그리고, '언제든' '어디든' '무엇이든'이다. '그날'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사람이 곁에서 떠난 날이다. 그 엄숙한 기일에 시인은 '언제든 넣을 수 있고' 어디든 살 수 있으며'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검정 비닐봉투의 이야기를 한다. 떠나간 소중한 이를 검정비닐 봉투가 수도 없이 사용 되듯 일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언제든' 떠올릴 수 있다. 소중한 이가 없는 이 세상에서 '구겨진 채로' 살아간다. 사실 그곳이 어디든 다를 바 없기에 '어디든' 구겨져서 살 수 있을 거라고 본인에게 스스로 위안의 손짓을 건넨다. 그리하여 지금 시인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소중한 이를 잃고 오랫동안 헤맨 존재, 오랫동안 본인의 무가치함을 그 소중한 이가 없음으로 해서 뼈저리게 깨달은 존재임을 안다. 그렇지만 시인에게 좌절은 없다. 소중한 이가 남겨준 행복했던 추억 몇 장 만으로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치 않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