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도 없는데 제가 왜요?"
학교에 처음 교사로 부임한 게 1997년이니 24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는 동안 경력이 쌓이고, 실력도 쌓이고, 아이들의 상태도 이해하는 선생님이 되어가고 있었다. 긴 시간 동안 전문직 시험을 보라는 권유를 여러 번 받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했다. "방학도 없는데 저는 싫어요. 게다가 엄청 늦게 끝난다던데요? 저는 지금 현재의 제 삶에 만족하고 있어요. 하루하루가 행복한데 굳이 전문직으로 옮겨 탈 이유가 없어요" 맞다. 방학이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참 좋아요. 머리가 심하게 아플 때도 수업을 하고 나오면 괜찮아질 때도 많고요. 아이들이 주는 에너지가 엄청나거든요. 기분이 나쁠 때도 수업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때가 많아요. 내가 뭔데 도대체 내가 뭐라고 이 아이들이 이렇게 눈을 빛내며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내가 하는 말을 들어줄까? 길거리에 나가서 나를 살펴보면 평범한 동네 아줌마고, 누구 하나 붙잡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는데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렇다. 학교에는 아이들이 있다.
이렇게 나에게 전문직을 권했던 많은 분들은 권유의 한 마디를 하시고 나서는 거절의 여러 마디를 들으셔야 했다. 그리고는 그 길고 긴 거절의 이유에 대해 지치신 건지 다시는 내게 같은 권유를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 분은 달랐다. 한 번의 권유로 끝나지 않았다. 잊어버릴 만하면 권유하시고, 또 잊어버릴만 하면 권유하시고 하셨다. 물론 그럴 때마다 나의 거절의 이유도 하나씩 하나씩 더 늘어갔다. "친정 엄마가 아프시고, 깜빡깜빡하셔서 저만 찾으시거든요. 아무래도 제가 가장 가까이 사는 딸이니 제가 돌봐 드려야 해요." 퇴근 시간에 딱 맞춰서 전화하시는 부모님 댁에 거의 매일 들르다시피 하는 나의 일과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졌다.
"그러죠, 뭐 시험 한 번 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렇게 권유하시니 시험 한 번 볼게요."
그러고 보니 벌써 작년이 되었다. 2020년, 코로나 때문에 전면 원격수업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도 고2인 딸도 19년 그 길고 긴 겨울방학을 시작으로(심지어 방학도 코로나 때문에 엄청 일찍 시작되었다.) 3월 개학도 온라인으로 진행된 채 집에 머물고 있었다. 학교엔 필수 요원인 교장샘, 교감샘, 교무부장, 그리고 연구부장, 보건교사, 교무실무사 등 몇 명이 학사일정이며 원격수업이며 처음 맞는 코로나 사태를 돌다리를 두드리며 개울을 건너듯 조심조심 건너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의 호출이 있어서 교장실에 내려갔다. '내가 뭘 잘못했나? 무슨 일이지?' 개인적인 호출은 별로 없으신 교장 선생님께서 뭔가 상의할 일이 있으신가 궁금했다. 소파에 앉으니 뜬금없이 전문직 시험을 한 번 보라 하셨다. 작년에도 한 두어 번 농담처럼 권하시고, 또 농담처럼 거절하고, 그렇게 했었는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이 분은 진짜로, 진심으로 내게 전문직을 권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바로 거절하기가 왠지 모르게 어려웠다. 그래서 쿨하게 대답했다. "그러죠, 뭐 시험 한 번 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렇게 권유하시니 시험 한 번 볼게요."
쿨한 대답은 나의 잠을 앗아 갔다. 대답은 하고 나왔으나 역시나 전문직은 아닌 것 같다. 걸리는 게 너무 많고, 난 지금의 삶에 만족하니까. 만족하니까, 만족하니까, 만족한다고? 집에 와 보니 고3, 고2인 아들 딸은 12월부터 벌써 4달 가까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공부를 하라는 말도, 공부를 안 하냐는 말도, 공부하지 말라는 반어의 말도, 무관심한 척하는 것도 이제 효과를 상실했다. 쫒아다니며 확인하는 것도 이제 지쳤다. '그래, 남을 공부시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차라리 내가 뭐라도 집중할 일이 생기면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방에 꾸겨진 채로 넣어진 공문을 살펴봤다. 뭔가 엄청난 것들을 준비해야 했다. 이 엄청난 것들을 어떻게 준비하지?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씬데, 문자 해독력이 떨어지는 건지, 뭔지 읽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오직 하나! 자기소개서뿐이네'
"나는 대한민국의 교사다."
그래서 가장 먼저 자기소개서를 썼다. 그런데 화면에 한글을 띄워 놓고 보니 참, 난감했다. 나는 나를 소개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자기소개서를 써 본 적도 없다. 임용만 준비하다 임용되었으니 나를 소개할 일이 없었던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전문직 소개서는 어떻게 써야 할까? 어떻게 써야 하지? 수필도 아니고, 편지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설은 더더구나 아니고. 어렵다 어려워
누군가 자기소개서를 쓴 걸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그걸 보여줄 사람도 없을 터였다. 특목고에 지원하는 아이들의 자기소개서를 고쳐 준 적은 있지만 내껀 또 다른 이야기다. 그때 스쳐 지나간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냥 나를 소개하면 되는 거잖아? 이건 어차피 점수화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자기소개서는 나의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겠지?' 그렇다. 나의 이야기를 쓰면 된다. 자신감을 갖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자기소개서를 읽는 사람들 또한 나와 같은 사람들, 동료 교사였던 사람들이다. 학교를 걱정하고, 학교의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들이다.
나의 교사로서의 이야기, 나의 교직에 대한 신념, 내가 그동안 추구해 온 학교의 변화, 내가 바라는 전문직에 대한 바람, 나에게 감동을 준 학교 이야기, 나를 변화시킨 동료 교사, 내가 바라는 미래의 학교의 모습 등 나의 이야기를 해 보자. 나의 이야기는 학교에서 시작해서 학교로 끝이 난다. 나는 현재 교사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를 소개하면 어떨까? '나는 대한민국의 교사다. 내가 나를 자랑스러워하자! 전문직 시험은 시험일뿐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지금도 학교, 미래에도 학교다.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자기소개서를 써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