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일 자로 나는 교사에서 장학사로 전직했다. 마음 속에 휘몰아치는 갈등을 그대로 싸 안은 채였다. 학교가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공간이고, 나는 교사로서 행복한 생활과 보람찬 생활을 하였는데 내가 과연 장학사로 전직한 게 잘한 일일까? 이 고민에 대한 답도 찾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 갔고, 나는 전직을 하였다.
6년이란 시간 동안 출근하던 학교를 떠나서 새로운 학교로 전근을 할 때에도 잠못 이루는 날들이 계속된다.
심지어 방학을 했다가 개학을 한다는 생각 만으로도 걱정이 태산이라서 잠을 못 이루고 새학기와 새학기에 만날 아이들과 새롭게 엮어가야할 수업 시간 등에 대한 고민으로 기본 일주일 정도는 가족들에게 스트레스를 부리기 일쑤다. '개학 증후군'이라 불리는 이 증상은 특별히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심한 강박과 스트레스로 집안 일에 손도 잘 안 가고, 맘도 잘 안 가며, 무기력증에 걸린 듯이 누워 있거나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꼬투리를 잡아 화를 내며 투덜거리는 증상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학 증후군' 증상을 겪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물론 3월 1일자 발령이지만 기존에 있던 학교의 업무를 마무리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새롭게 나가야 할 직장에서 업무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학교의 업무 인수인계는 그나마 그동안 함께 동고동락했던 선생님이고 일의 시작과 끝을 잘 아는 선생님이며 나보다 훨씬 정리정돈을 잘하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스타일의 선생님이라 걱정이 없었다. 단지 하나의 걱정이 있었다면 내 후임자 선생님이 내가 한 일을 보고 '뭐 이렇게 일을 대충대충 했어?' 하며 내 흉을 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만이 있었달까? 그런데 교육청은 그렇지 않았다. 업무 인수인계를 받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나 사실, 그 많은 말들은 내 머리를 스치고 이쪽 귀에서 저쪽 귀로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뭔가 끄적거리며 적는 척 하였으나 알고 적은 것은 아니었다.
발령을 받고 나서 2월에 사무실에 일찍 적응하면 좀 수월할까 싶어 몇 번 출근을 하였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일단 나는 나의 개인정보를 스스로 수정해야 했다. 어디를 어떻게 바꿨는지 모른다. 여튼 개인정보를 수정할 수 있는 모든 곳에 들어가서 나는 '교사'인 나를 스스로 '장학사'로 고쳤다. 그리고 스스로 '명함'을 만들었다. 다행히 함께 발령이 난 장학사가 있었다. 그는 경력직 장학사였고, 나는 새내기 장학사였기에 그의 도움은 나에게 가뭄의 단비 만큼이나 고마웠다. 그렇지만 그도 지역청에서 근무하다 왔기에 본청의 시스템을 모두 아는 것 같진 않았다.
새로운 용어들이 나를 압박했다. 교부, 재배정, 성립전, 학교회계 전출금, 기관 전출금, 확정내시서, 업무지원,
210, 230, 240, 610, 620 등의 숫자는 나의 머리에 혼란의 씨앗을 뿌려놓고 절대로 정리되지 않은 책상 속처럼 흩어져 있었다. 전임자가 마련해 놓은 계획서가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을 내가 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메세지 하나하나가 다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었고, 공문 하나하나는 이해할 수도 없는 더 큰 일이었으며, 예산 담당자가 보내는 메세지는 무슨 외계어 같은 말들로 수두룩하게 채워져 있었으며, 그의 메세지는 나를 초과근무로 이끌었다. 나는 아이들과 하는 수업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행정'에는 영 젬병이었고, 숫자 계산에는 늘 오류 투성이였으며, 무슨 일을 철저하게 검증하며 하는 스타일의 사람도 아니었다. 나를 채찍질하고 반성하고 탓하는 날들이 이어졌고, 나의 자존감은 땅바닥을 기고 있었다.
집과 학교가 10분 거리였던 과거에 비해 이번 직장과 집은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출 퇴근 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떠오르는 해와 맞서서 운전을 해야 했다. 나는 굳게 다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퇴근 시간을 9시는 넘기지 않겠다고. 그 원칙을 지키며 나는 삼월 한 달 내내 출근한 날만큼의 야근을 했다. 일하다 밥먹고, 일하다 화장실 가고, 일하다 밥 먹고 이런 날들 속에서 체력은 고갈되어갔고, 병아리처럼 지저귀기 좋아하는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수가 점점 줄었으며 나의 필명인 빨간 너구리처럼 나는 변해가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 출근했을 때 눈의 모세혈관이 충혈되었다. 나는 출근해서 밥 먹는 점심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고 아침 8시 반에서 저녁 9시까지 컴퓨터 화면과 대화한다. 그는 내 머리가 주문하고 내 손이 시키는 일을 하는데 대부분은 눈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전달한다. 손목에 문제가 있을거라고 예측했었다. 그러나 손목에 문제가 생기기 이전에 눈에 문제가 생겼다. 약국에서 약을 사서 먹고, 눈에 안약을 넣으며 벼텼다. 나의 마음 속에 이런 갈등이 휘몰아쳤다.
'대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나는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있기는 한 걸까?'
'누구를 딱 집어 어떤 학생이 보고 싶은 건 아닌데 아이들이 무척이나 보고 싶다. 애들과 수다떨고, 웃고, 이야기하고, 소란스럽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들의 투덜거림이, 심지어 불평불만조차 그립다.'
브런치에 그동안 연재했던 글들을 책으로 발간 하려다가 나는 덜컥, 발령이 났다. 그래서 멈춰 있던 책 발간을 마무리하려고 동료 교사에게 추천의 글을 부탁했다. 삼월의 끝자락 어느 아침 나는 동료 교사가 보내 온 추천의 글을 읽다가 그만 눈물샘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게 나의 모습은 아닐까' 라는 구절에서 나는 소리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혼자'가 되버린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저만치' 멀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돌아갈 '산'도 '집'도 없어져 버려 혼자 울고 다니는 '새'가 되버린 것이다. 아! 나는 학교가 그리워 그만 병에 걸린 것이다.
내가 나로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날이 오기는 오는 걸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이 글을 쓰는 나는 이런 질문을 나에게 던질 수 밖에 없다. 미래의 나는 답을 알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