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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너구리 Sep 11. 2023

갱년기 마음사전

생리

나의 초경은 6학년 때 시작되었다. 내 나이 또래 아이들 중에 몇몇은 생리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생리에 대해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이렇다 할 교육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처리 방식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아마도 초등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뭔가를 보긴 했다. 가슴이 나왔다고 큰언니 친구들이 놀렸던 게. 그때는 놀리는 언니들이 뭐라 하는 건 지 잘 몰랐으나, 언니가 두 명이나 있었던 나는 언니들이 생리대를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서 자랐다. 언니들은 생리대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어디 구석에 박아 놓든가, 벽장 구석에 숨겨 놓든가 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로 인해 아빠가 벽장에서 뭔가를 찾아 헤맬 때 숨겨놓은 생리대와 피 묻은 팬티들이 발견되곤 했었다. 아빠는 불같이 화를 냈고, 언니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혼났었다. 그때 어렴풋이 뭔가를 보긴 했으나 그것이 초경인 줄은 몰랐다.

드라마에서 본 백혈병을 떠올리고, 이제 나도 죽는가 싶어 방구석에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삶에 이렇다 할 집착도 없었다. 그냥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날 방에 가만히 누워서 세상을 달관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나를 보더니 작은 언니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죽음을 덤덤하게 준비하는 내게 언니는 생리대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죽을병이 아니었다. 그 뒤로 나도 언니들처럼 피 묻은 팬티와 생리대(흔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흰 천으로 대신했으며, 자주 빨아야 했는데, 엄마는 또 농사일에 바빠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를 아빠의 눈을 피해 들키지 않을 곳에 여기저기 숨겨가며, 그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만난 생리는 참으로 귀찮은 존재였다. 할 때마다 기분이 나쁘고, 몸이 아팠다. 피가 쏟아지는 느낌도 안 좋을뿐더러 축축한 느낌은 더욱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생리통은 또 어찌나 심한 지 몸이 약해빠진 나는 생리할 때마다 결석을 했다. 방바닥을 기어 다닐 정도로 아파서 생리가 오는 게 정말 싫었다.

빨리 생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생리가 없어지면 얼마나 편할까?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결혼해서 애를 낳을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매달 생리를 해야 하는 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자랐다.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런 생리가 끝나간다. 한 달을 안 오고, 두 달을 안 오고, 세 달을 안 오고, 그러더니 일 년을 오지 않았다.

날아갈 듯이 기뻐야 하는 데 이상하게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에 생리가 불규칙해서 산부인과에 갔었다. 증상이 어떠냐면 생리가 3일에서 일주일이면 끝나는데 15일 이상 계속 생리를 하는 거였다. 생리혈이 팬티에 계속 묻기 때문에 삶의 질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참을 수없으니 산부인과를 간 거였는데 병원에서 자궁적출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나는 맹장이 없다. 첫 애 임신하고 8주 차에 맹장수술을 했다. 아기를 뱃속에 넣고 한 수술이라 많이 걱정했지만 아이는 지금 잘 자라 벌써 군대도 다녀왔다. 그때 맹장을 제거했기에 맹장이 없다. 그런데 자궁도 제거해야 한다고 하니 뭔가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장기들은 나에게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장기를 자꾸만 없앤다고 생각하니 상실감이 컸다. 다행히 다른 병원에서 자궁적출은 하지 않고, 혹들만 제거하면 된다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증상은 잠깐 좋아지다가 다시 원위치가 되었다.

자궁적출하라고 했을 때 들었던 상실감이 생리가 끊어지고 나서 다시 왔다.

'나는 여자로서 이젠 자격 상실인 건가? 여자가 더 이상 아닌 건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여자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내가 정의하고 있는 여자란 생리를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인 건가? 생리를 하는 동안은 여성 호르몬이 나온다고 하는데 여성 호르몬이 나오면 좀더 여성스럽다고 한다. 목소리도 여성스럽고, 피부도 좀더 부드럽다고 한다. 그래서 호르몬제를 먹거나 투여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여자의 의미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여자의 의미를 과연 어떤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의구심도 들었다. 생리가 끝났으니 남자와 여자를 떠나 나는 당당한 한 인간이 된 것이 아닐까? 역할로 구분되지 않고, 성으로 구속되지 않으며,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닐까?

생리가 끝나고 나는 자유인으로 처음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살아보려고 노력 중이다.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 노부부가 길을 걸을 때 어떤 분이 할아버지고 어떤 분이 할머니인지 의상이 없다면 구분이 안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상당히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나도 그런 행복한 노후를 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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