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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 작가 Apr 25. 2023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

앤솔로진03

“고독이 시작되는 밤은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을 알립니다. 당신의 고독은 안녕하신가요?”


모든 것은 끝이 나고 다시 시작된다. 하루가 그렇고 사계가 그렇다. 하루의 끝은 밤에서 시작되고, 사계의 끝은 추운 겨울날 자신의 모든 것을 자연으로 되돌리면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끝의 시작은 어디일까?


                         에드워드 호퍼, <빈방의 빛>, 73 x 100.3cm, 캔버스에 오일, 1963, 개인 소장


여기 빈방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안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는 이 장면은 <빈방의 빛>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아침을 여는 빛이라기보다 저녁의 어둠을 몰고 오는 빛 같다. 창밖으로 살짝 보이는 숲의 어둠이 이미 밤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둠이 오기 직전의 빛이 가장 밝게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정적인 시간이 긴장감을 주고 수직의 선들은 빛과 그림자를 나누어 시작과 끝을 알리고 있는 듯하다. 이 공간에서 암시하고 있는 부재, 그리고 빛의 이면은 뭔가 쓸쓸하고 고독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모두 기다림의 공간 속에 홀로 갇힌 존재들이다. 밤의 시간(절망이나 상실감을 견디는 시간)은 오롯이 혼자 그 시간을 견뎌내야만 한다. 하루의 끝에서 남은 시간의 몫을 다하여 다음 생을 이어가야 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가?(마크 스트랜드, <빈방의 빛>, 한길사, p.51시간을 둘러싼 질문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삶의 전과 후의 시간을 담은 저 빈 공간의 그림처럼 말이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시간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언의 암시들. 고독을 몰고 오는 어둠의 긴 시간 안에서 자신과 조우하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빛으로 우리는 되살아날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 이하 호퍼)이다. 호퍼는 현대 미국인의 삶과 고독, 상실감을 탁월하게 그려내며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아 온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이다. 도시의 일상적 공간을 그렸으나 느슨한 구성과 활기찬 분위기의 그림이 아닌 스냅 사진 같은 구도 속에서 조용하고 비개성적인 인물들과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들을 통해 벗어날 길 없는 고독감을 보여주는 작품을 많이 그렸다. 이렇게 도시공간 속 몰개성화된 개개인의 일상과 고독감을 잘 표현했기에 지금의 우리에게도 감성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잠시 호퍼의 예술적 행보를 들여다보자.

 

호퍼는 188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해 뉴욕 예술학교에서 로버트 헨리에게 그림을 배웠다. 1906년 24세 때 파리로 유학을 떠났으나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19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유럽을 여행했다. 그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실험적인 작품에 영향을 받지 않고 생애 내내 자신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추구했다. 도시의 일상적인 장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런 그림을 통해 감상자는 익숙한 주위 환경을 낯설게 느끼게 된다. 호퍼는 1960-1970년대 팝 아트와 신사실주의 미술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희미하게 음영이 그려진 평면적인 묘사법에 의한 고독한 분위기를 담은 건물이 서 있는 모습이나 사람의 자태는 지극히 미국적인 특색을 보였다.

 

호퍼는 자신의 작품에서 자주 반복되는 주제로 인근 여러 장소를 사용했다. 그는 또한 새로운 이미지를 위해 버몬트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까지, 남서부를 통해 캘리포니아까지 자동차 여행을 하고 멕시코를 네 번 방문하는 등 더 멀리 여행을 하곤 했다. 그러나 어디를 여행하든 호퍼는 자신이 선택한 주제, 즉 개인(특히 남성과 여성) 사이의 긴장감, 시골과 도시 환경 모두에서 전통과 진보 사이의 갈등, 하루 중 다양한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분위기를 찾고 탐구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호퍼, <호텔 방>, 152 x 166cm, 캔버스에 오일, 1931, 국립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현대 도시의 외로움은 호퍼 작품의 중심 주제이다. 이 그림에는 한 여성이 익명의 호텔 방에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밤이었고 그녀는 피곤했다. 그녀는 모자, 드레스, 신발을 벗고 짐을 풀기에는 너무 지쳐서 다음 날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 있다. 공간은 전경의 벽과 오른쪽의 서랍장으로 제한된다. 침대의 긴 대각선은 우리의 시선을 배경으로 향하게 하고 열린 창문은 보는 사람을 방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음증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생각에 잠긴 여성의 모습은 방의 차가움과 대조를 이룬다. 방의 날카로운 선과 밝고 단조로운 색상은 위로부터의 강한 인공조명으로 인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호퍼는 인간 내면의 고독, 상실감, 단절을 빛과 공간을 활용하여 현실을 단조롭거나 무덤덤한 느낌으로 표현한다. 대부분 묘사된 사람의 외로움을 강조하기 위해 술집, 모텔, 역, 기차와 같은 공공장소를 그리는데 공간은 거의 비어 있다. 또한 그는 빛과 그림자의 강력한 대비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더욱 높인다. 그의 과묵한 성격과 엄숙한 태도는 그의 작품에 강력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현실을 단순화하고 현대인의 고독을 포착하는 데 능숙한 것이 특징이다. 그의 그림은 현대 생활의 위기를 상징하는 대공황의 미국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호퍼의 그림들을 보면 당시 미국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하지만 지금의 우리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의 그림 속 텅 빈 공간의 부재와 쓸쓸함, 고독을 암시하고 있는 그의 그림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음습해 오는 밤이 고립과 단절감을 안겨주고 있지만, 그것이 끝을 예고하지는 않는다. 빛과 어둠의 교차는 희망과 절망으로 해석해 볼 때 우리의 삶에 있어 끊임없이 끝과 시작을 알리는 신호 같다. 소비문화에 젖어 자신의 존재감을 잊어버리진 않았는지, 바쁘게 사느라 다소 지쳐 있는 건 아닌지 호퍼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오늘 밤 고독해져 보는 건 어떨까.





고독을 영어로는 종종 solitude로 번역된다. solitude는 순수하게 ‘혼자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여기에는 외로움이나 쓸쓸함과 같은 의미가 포함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명상이나 창작, 수행 등을 위해 혼자 있는 것을 가리켜 solitude라고 하는데 한국어에서 그러한 상태를 가리켜 고독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국어사전에서 보면 고독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하다’라고 나온다. 하지만 고독은 외로움을 뛰어넘어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유명한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도 사람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가지고 있던 페르소나를 벗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고독이란 조용한 가운데 깨달음을 얻는 일이다. 텅 빈 공간에서 어둠과 마주하는 시간. 그래서 가끔 우리에게 사색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꿈일지라도 말이다. 


 

참고문헌

『빈방의 빛』, 마크 스트랜드 지음, 박상미 옮김, 한길사, 2016



“하루의 끝에서 나의 내면과 조우하고 진정한 고독을 즐기며 사색하기를 바라며”-이랑




http://www.antholozine.com  

현재 앤솔로진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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