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으러 사무실 근처의 김치찌개 집에 앉아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옆 테이블에 앉았다. 재회는 상상해보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도쿄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다. 우리가 이탈리아를 이겼던 날엔 이탈리아에서 온 친구들의 안색이 변하기도 했고 일본이 16강에서 탈락 하자 수업 시작 인사처럼 건네던 선생님의 월드컵 이야기가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토너먼트가 진행될수록 우리만의 축제가 되어갔다. 한국 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목에 힘이 들어갔고 항상 기숙사에서 응원하던 나도 붉은 악마로 함께 하려고 응원의 현장을 찾아 떠났다.
우리는 당당하게 빨강 티를 입고 신주쿠역에서 만나 신오오쿠보로 걸어갔다. 분명 어느 한국식당에 모여 응원을 한다고 들었는데 당최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 길을 물어보려 들렀던 한인 부동산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목 터져라 응원을 시작했다. 뜬금없이 들이닥친 붉은 악마에 놀란 사장님도 대동 단결해 목청껏 응원을 했다.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되기 전에 사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고 다시 식당을 찾아 나섰다.
결국 그날 박지성이 골을 넣었고 우리는 승리했다. 우리보다 앞서 승리에 취해있던 울트라닛뽄과 함께 기쁨의 행진도 하고 반쯤 미친 채로 사진을 찍었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이 떨어지고 난 후에는 월드컵 분위기는 싹 사그라들고 말았다. 나와 함께 응원에 나섯던 그녀는 대사관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미술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어학원에 왔다고 했다. 서울구경도 못해본 나는 그 친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서울스러움에 반했다. 이내 합이 잘 맞아 함께 유카타 체험을 하거나 불꽃놀이 구경도 가고 세일 시즌에는 쇼핑을 하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그렇게 일 년을 보낸 우리는 시부야에 새로 생겼다는 온통 노랗던 립톤 카페에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녀는 미대 입시에 성공했고 나는 복학을 위해 귀국날을 받아 놓았었다. 이제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꼭 한국 가서도 연락하고 한국에 오면 만나자는 허무한 약속을 했더랬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일본에서 사귀었던 친구들은 복학하고 대부분 연락이 끊어졌지만 서울에 취직을 하면서 다시 만난 이들도 있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도 잊고 있던 그녀와의 추억 소환에 하루 종일 웃음이 났다.
"어떻게 연락을 해보지? "
설레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기억할지가 가장 걱정이었다. 그녀의 싸이월드에 글을 남기고 그녀의 반응을 지켜봤다. 분명 반가워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처럼 즐거운 재회로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우리의 재회가 신기하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렇게 지척에서 일을 하고 있을 줄이야. 서둘러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새로 생긴 예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마치 전 여자 친구와 재회하는 기분이 이럴까 싶었다. 그녀는 내가 일하던 바로 앞 건물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종종 너를 생각했어, 언제나 예쁘고 똑똑한 친구였으니까”
“언니는 항상 즐겁고 재미있었는데 말이죠.”
아쉽게도 6년의 공백을 채울 만큼의 친밀함은 아니었나 보다. 그러나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다른 세계의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풍경에 그녀의 이야기가 덪입혀져 마치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만약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나도 웃고 있을까?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함께 진학했던 친구들의 이야기까지 하고서야 우리는 헤어졌다. 우리의 추억 소환이 바닥이 날 때쯤 내가 이직을 하면서 연락이 뜸해졌다. 싸이월드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서로의 안부도 어색해져 다시 서로의 추억 속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또다시 우연에 우연을 더하지 않으면 재회는 어려울 것 같다.
몇 년을 함께 지내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기억에서도 잊힐 즈음 눈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인연이 있다. 반가운 우연으로 재회했다 하더라도 인연을 이어가는 일이 쉽지는 않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 말에 기대어 연애를 하기도 하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암시한다고 찰떡같이 믿기도 한다. (사기꾼들이 설계에 이용하는 수법이 먹히는 이유기도 하겠다.) 그러나 이 친구와의 만남으로 깨닫게 된 건 몇 만 분의 확률로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계시나 인생의 전환점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와의 만남이 소설 속의 한 장면이었다면 운명을 흔들 귀인이 엇겠지만 말이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누구나 의외의 장소에서 반가운 사람 혹은 당혹스러운 사람(전 남자 친구라던가)을 만난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일로 어마어마한 우연에도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