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이스탄불, 셀축, 파묵칼레, 카파도키아, 가지엔테프
바르셀로나에서 ‘유럽대륙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아시아대륙을 볼 수 있는' 튀르키예(얼마 전까지만 해도 터키였는데 사람들은 금방 새 이름에 적응하는 것 같다.)의 이스탄불로 넘어갔다. '아시아'라는 말만으로도 우리나라가 점점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스탄불 시내로 진입하는 버스에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어딘지 익숙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내게는 남산 쪽으로 한남대교를 건너갈 때 보이는 한남동 풍경을 연상시켰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우린 토플리스 차림에다 때론 나체까지 보게 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해변에 있었는데,
얼굴을 다 가리고 눈만 내놓고 그 눈마저 반투명 천으로 가려 나이도 가늠할 수 없는 부르카를 입고 지나가는 이슬람 여성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 세 명의 여인이 우릴 스쳐 지나가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긴 치맛자락이 살짝 펄럭였다. 치맛자락 속으로 청바지와 커다란 농구화 같은 운동화가 얼핏 보였다. 이 모습에 얽힌 정치, 경제, 종교의 이슈가 머릿속에서 충돌했지만 나름 안심이 되었다.
이스탄불은 ‘비잔티움’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이기도 했다가 15세기에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이스탄불’이 되었다고 한다. 1923년에 터키공화국이 수도를 앙카라로 옮기면서 지금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유적에, 초기기독교 유적, 비잔틴제국, 오스만제국의 이슬람문화까지 다 남아있다. 관광객들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가지 문명을 거쳐 온 이곳의 유적을 동시에 봐야 하니 역사적 맥락을 짚지 않고서는 헷갈리기가 쉽다.
19세기까지 이슬람제국의 궁전이었던 톱카프 궁전으로 향했다. 술탄들이 살았던 궁전답게 거주하는 사람만 5만 명이 넘었다는 여기에 그 유명한 하렘도 있었다. 당시의 생활도구나 장신구를 전시해 놓은 술탄의 보물관에는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에 에메랄드 단검까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 것 같은 보물들이 가득해서 눈이 호강하는 느낌이 들었다.
토카프 궁전에서 내려오는 길에 점을 봐주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닭이나 토끼가 점괘가 적힌 종이를 뽑는 점이다. 남편은 닭점을 선택했다.
닭이 뽑아준 점괘의 내용은 '시도하는 일은 모두 성공을 거둔다. 시간이 조금 걸릴지라도 원하는 만큼 부(富)를 이룬다.'였다. 아마 모든 종이에 적힌 점괘가 비슷한 내용일 테지만 기분이 좋았다.
큰 부는 바라지도 않고 작은 부라도 빨리나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도 그 '부'는 올 생각을 안 한다. 밥 먹고 살면 됐지 욕심부리지 말자고 생각하다가도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게 오늘도 나는 욕망에 시달리며 끝없이 고민한다.
토카프궁전과 함께 이스탄불에서 꼭 가야 할 곳은 아야소피아박물관이다. 아야소피아는 동로마제국 때 건설된 그리스도교 성당이었다가 이슬람제국 땐 모스크로 변형되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다른 곳의 유물을 가져다 전시하지 않고 그저 복원과 보존만 해도 볼거리가 다양한 박물관이다. 대리석과 화려한 금색모자이크에 이슬람식 장식들이 오랜 시간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구나!’를 느끼고 가이드를 찾았다. 가이드 비용이 비싸서 깎아달라고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면서 얼른 인도인 가족 관광객을 추가로 섭외해 왔다. 덕분에 우린 반값에 설명을 들었는데 인도인 가족은 돈을 다 내는 눈치였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오래간만에 제대로 흥정한 것 같아 기뻤다.
웬만하면 달라는 대로 다 주고 흥정이라는 것에 약한 우리 부부에게 튀르키예는 살짝 위험한 곳일 수도 있었다. 가이드북에는 식당에서 서비스로 주는 것 같은 덤을 덥석 받았다간 그 값도 내야 한다며 주의하라는 경고가 있었다. 인심 좋아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권하는 대로 받았다간 받은 거 다 계산해야 하고 식사 후에 공짜로 주는 것처럼 차를 내오고 나선 찻값을 다 계산해서 받는다. 문화의 차이겠지만 단호한 거절이 상책인데 우린 그런 부분에 서툴렀다. 이런 점은 국경도시 가지엔테프에서도 나타났다
(과연 인간의 문명이 발전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세련된 문명을 보여주었던 에페소스 유적지에선 한국인 단체관광객을 5팀이나 만나고, TV에서 로마 유적 기둥이 잠겨있는 온천 수영장을 보고 ‘세상에, 저긴 어디일까?’라고 궁금해했던 파묵칼레의 하얀 신비로움에 빠졌다가, 손님의 시간 따윈 안중에도 없이 3시간이나 지체된 카파도키아의 벌룬투어에서는 소곱창집에서 파는 양을 구겨놓은 듯 올록볼록, 뾰족뾰족한 바위 산맥 위에 닿을 듯이 나는 열기구를 타자마자 줏대 없이 감탄하고, 한국인은 거의 없는 넴루트 터키 동부 투어를 마치고 국경지역 도시인 가지엔테프에 도착했다.)
가지엔테프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에게 추천받은 호텔을 찾아갔는데 숙박비가 생각보다 너무 비쌌다. 무르기 짝이 없는 부모는 흥정을 포기하려는데 아들은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튀르키예에서는 흥정하면서 세 번은 돌아서야 하는데 어떻게 한 푼도 안 깎느냐며. (난 이 말을 들은 기억이 없는데 이 아이는 어디서 이런 말을 들었던 것일까.)
준이의 눈물을 확인한 호텔 직원이 (우리 돈 약 4천 원이긴 하지만) 결국 깎아줬다. 짐 들고 온 직원에게 깎은 돈 4천 원에서 천 원(터키 통화로 1TL)을 팁으로 주면서 서로 웃었다.
비싸긴 해도 아침과 저녁밥을 준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라고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준이를 달래며 시내 구경을 나갔다.
그런데 이 동네, 그저 시리아로 넘어가기 위해 선택한 도시였는데 고고학 박물관을 보니 일부러라도 와야 할 곳이었다. 타일로 그리스 로마신화를 표현한 고대 로마의 모자이크 유물이 많이 소장되어 있었다. 박물관뿐만 아니라 가지엔테프엔 볼 곳도 많고 피스타치오가 잔뜩 들어간 달달한 과자 등, 맛있는 것도 많았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질 무렵 빵 가게 앞을 지나는데 분주하게 빵을 반죽하고 화덕에 굽는 모습이 보였다. 가게 밖으로 솔솔 풍겨 나오는 빵 냄새와 빵 만드는 모습에 넋을 잃고 구경하고 있자니 안에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훈훈한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빵 만들던 아저씨가 준이 손에 갓 구운 빵을 인심 좋게 건네주셨다.(물론 이건 공짜였다.) 지금도 이방인에게 주는 따뜻한 정이 흐르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그분들에게 바카스 한 박스라도 사다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튀르키예에선 사소한 바가지쯤은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요르단과 이집트에서 '바가지 대전쟁'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가 아니라 그것을 상쇄할 만큼 충분히 따뜻한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따뜻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