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동부지역(넴루트 투어)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에서 슬렁슬렁 동네를 걷다가 우연히 본 여행사에서 넴루트유적지를 돌아보는 투어를 신청했다. 넴루트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산 이름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 이후 세워진 콤마게네(Commagene) 왕국의 유적지이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양쪽 계통을 모두 이은 문화로 거대한 석상과 아름다운 일출로 유명하다.
넴루트를 향해서.
봉고차를 타고 건조한 동남부지역을 2박 3일 동안 무지막지 달리는 투어가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 가이드 겸 운전사인 여행사 사장님은 여행사의 문을 잠가 놓고 그의 조그만 봉고차(승합차?)에 투어 참가자들을 태웠다. 동서양의 가운데 있는 튀르키예답게 십여 명의 투어 참가 인원은 동서양이 반반이었다.
지금은 황량해진 고대 실크로드 대상인의 집 잠깐 구경하고 아이스크림 사 먹은 것 빼고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봉고차는 계속 달리기만 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잘 모르는 채로 좁은 차 안에 덜컹대며 실려 가는데, 참가자 중 한 명인 대만 아저씨 루이가 요즘 대만에 이 또래 아이들은 늘 투덜대는데 비해 준이는 힘들 텐데도 불평하지 않는다고 칭찬했다.
아이고 아니라고, 준이도, 한국아이들도, 이 또래는 다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는데 생각해 보니 투덜대왕 준이가 어느 순간부터 거의 불평을 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나 더위를 못 참아서 조금만 더워도 짜증내기 일쑤였는데 에어컨이 고장 난 데다가 창문도 안 열리는 봉고차를 10시간째 타고 있어도 그림 그리다가 놀다가 가고 있었다.
‘몇 달 사이인데 벌써 이렇게 컸구나.’
일 년 동안 가족끼리 여행하는 중이라고 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넌 행운아’라고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다 보니 어느새 만족도가 높아진 건가? 아니면 하도 고생을 하며 다녀서 웬만해선 끄떡 않는 내성이 생긴 걸까.
준이의 성장을 문득 깨닫게 해 준 대만인, 루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일 년에 단 열흘만 일한다고 한다.
친구들의 권유를 못 이겨 동업으로 식당을 열기도 했지만 금방 포기하고 다시 본업에만 집중하기로 했다고 한다. 루이의 환상적인 본업은 바로 새해맞이 폭죽장사였다.
일 년에 일하는 시간 열흘을 빼고 남는 시간은 주로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지만 워낙 춤을 좋아해서 가는 곳마다 나이트클럽을 꼭 챙겨간다고 했다.
나도... 나도 돈 벌면서 시간도 많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관광객은 거의 없는 북부도시까지 여름 6개월만 일한다는 아이스크림집을 찾아가기도 했고 아르헨티나 남부나 일본 북부에서 반년만 여는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하면 어떨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돌아가면 적게 일하고 많이 노는 일을 꼭 찾아내리라 다짐했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끝없는 평지를 달리던 봉고차는 이제 관광객이 잘 오지 않는 동부 시골 마을들을 굽이굽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로마 유적의 다리들을 스쳐갔고 어느 농가에 들러 무화과를 따 먹기도 했다. 할머니가 손녀와 나귀 타고 장에 가는 모습도 보았고 사교적인 할아버지들이 배기팬츠 같은 멋진 바지를 입고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 아이들도 사진 찍어달라고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인적 없는 시골길에서 잠깐 쉬는 동안에 다른 참가자인 일본인 케이가 땅을 파며 놀고 있길래 흙장난하냐고 물었더니 직업이 리서처라고 했다. 각 지역을 여행하면서 광물자원에 대한 리서치를 한다고 했다. 루이 말고 부러운 직업이 또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인 넴루트산에 도착했다. 밤늦게 도착한 숙소에서 자는 둥 마는 둥 새벽 4시에 일어나 추위를 뚫고 산 정상에 올라가면 고대 콤마게네 왕국의 거대한 석상 앞에서 일출을 맞을 수 있다. 해발 2,150m의 산 위에 있는 거대 두상은 원래 위쪽 석상에 붙어있던 것이다. 고대 신들과 왕들을 조각한 석상들은 무너져 내려 머리 따로 몸 따로 흩어져 있지만 머리 하나의 크기만도 2미터가 넘어 사람 키보다 컸다. 그 압도적인 크기에 당시의 문명은 얼마나 찬란했을까 궁금했다.
산에서 내려와선 아타튀르크댐을 구경했다.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자리한 터키가 물길을 막으면 시리아와 이라크의 물 부족이 심각해지기 때문에 아타튀르크 댐은 건설부터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댐의 전망대에서 차를 마시며 가이드이자 운전사이며 마술사인 여행사 사장님의 신기한 각설탕 마술을 보고 나자 봉고차는 참가자들을 몰아 태우고 다시 달려갔다.
이 투어의 마지막 도시는 아브라함의 탄생지인 우르파다.
이 신성한 도시는 계율도 엄격해서 모스크에도 남녀가 따로 입장했다. 모스크 입구에서 준이와 남편과 헤어져 혼자 들어가자니 마치 대중목욕탕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우르파 거리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왔다니까 터키와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며 반가워하시고 시장에선 적극적인 상인들과 사진 찍어달라 조르는 아이들을 만났다. 우르파 시장 구경으로 이 투어도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참가자들 모두가 즐겁게 저녁을 먹고 헤어졌는데, 대만 아저씨 루이를 필두로 흥에 겨운 몇 명은 이 도시에 숨겨져 있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남자들끼리만 단체 군무를 추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 넓은 나이트클럽 전체에서 일행을 따라간 일본인 케이가 유일한 여자였다고 한다.)
넴루트 투어는 2박 3일의 짧은 투어였지만 먼 거리를 달려서였는지 긴 여행으로 느껴졌다.
힘든 상황에도 불평 않던 준이와 일 년에 열흘만 일해도 먹고살 수 있는 루이와 여행이 일인 케이와 튀르키예 동부사람들과 아타튀르크댐 아래쪽의 시리아, 이라크 사람들과 우르파 모스크에서 기도하던 신실한 무슬림들과 숨겨진 나이트에서 단체군무를 추는 남자들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나는 인생의 만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삶의 조건과 상황이 다를지라도 만족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점은 모두 같을까, 어떻게 해야 인생에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