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디자인, 2016~2021, 지금
2021년에 열린 전시 <그래픽디자인, 2016~2021, 지금> 에서 활용된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인터뷰.
서랍 안에 들어있던 3년 전의 인터뷰를 다시 읽으며 이 때의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지금의 나는 얼마나 여전하고 또 얼마나 바뀌었는지 같은 것들을 돌아보고 생각했다. 이 때는 이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 지금의 나는 2021년의 나는 상상도 못했을 곳에서, 상상도 못한 삶을 살고있다. 그래도 본질적인 마음가짐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아. 또 언젠가 이 순간을 돌아볼 나를 위해 인터뷰를 글로 발행해둔다.
들어가며
* 이 글은 2021년에 쓰인 글입니다.
* 2021년 당시에 재직했던 회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 본 인터뷰에 등장하는 '현재 근무중인 회사'는 회사 안팎으로 조직문화, 분위기에 대한 평판과 의견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편입니다. 사일로마다, 챕터마다, 팀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현재 근무중인 회사' 바로 전에 다녔던 회사가 극악의 난이도였어서 그런지, 이 곳은 그냥 선녀같았습니다...
현재 디자이너로서 당신의 상황은 어떤가요.
나의 첫 직장은 블랙이었다.
대표를 제외하고 여성 디자이너 4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디자인 에이전시.
22살에 교수님의 추천으로 이곳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첫 3개월은 수습이라고 월급을 70%만 받으며 다녔다. 나에게 이곳을 추천해주셨던, 당신의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시던 교수님 또한 수습 월급을 이렇게 주셔서 나는 수습기간 월급을 깎는 것이 이 업계에서는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대표를 제외한 4명이 디자인 업무를 각자 담당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4명분의 업무량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지금 회사랑 비교해보면 6명~7명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심지어 지금 회사도 일 많기로 유명한 편인데도 이정도 업무량은 선녀라고 느껴질 정도로, 일이 정말 정말 많았다. 이 또한 당시에는 이 업계에서는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대표는 과거의 명예를 안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 시절의 권위를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채, 시도 때도 없이 분노와 폭언을 일삼아 직원들을 눈치 보게 만들었고, 점심 식사 자리에서는 서빙하는 직원들을 보며 성희롱성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4개월간 일을 하며 '이 업계는 정말 힘든 곳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일들이 부당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연하다 느끼며 4개월을 버텼다. 그즈음 대표에게 개새끼, 병신 등의 모욕적 언사를 들었다. 내가 한 일이라곤 클라이언트의 부당한 요구에 그것은 진행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 뿐이였다. 그것은 분명히, 나의 실수가 아니였다. 설사 실수를 하거나 손해를 끼쳤다고 하더라도 그런 언사는 절대 정당화 될 수 없다. 나는 그제서야 업계가 아니라 이 회사가 문제라는 걸 깨달았고, 마침 개인적 상황이 겹쳐 그 길로 퇴사 의향을 대표에게 밝혔다. 대표는 내가 퇴사하는 날 까지도 나에게 사과 하지 않았다.
이 때를 회상하면 지금은 천국이다. 일에 대한 보람은 물론이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까지. 사내문화를 만드는 팀이 따로 있을 정도니 말 다했지, 뭐. 여기서는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함께 일한다. 피드백은 솔직하지만, 상처가 되지 않는다. 자기가 맡은 일의 DRI는 온전히 자신한테 있어 상사의 마이크로 매니징 없이 모두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다. 회사라는 사회에서 일 외의 다른 것들 (주로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일들)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최선을 다해서 일하기만 하면 된다. 고용형태? 상하관계? 회사에서의 근속연수?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하는 동료일 뿐이다.
첫 회사는 나의 아주 많은 부분을 바꿔놓았다. 아이디어가 샘솟던 머리는 딱딱하게 굳었고, 불확실한 도전을 즐기던 모습은 흐릿해졌다. 그 전까지는 안정적인 직장에 통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첫 회사를 거친 후에는 안정적이고 복지가 좋은 직장을 추구하게 되었다. 사실 첫 회사 안에 있을 때에는 업계 탈출, 이른바 탈디자인까지도 고려했었다. 주변에서 인정받고, 나 스스로도 재밌어서 늘 시도하고 찾아다니던 '디자인'이었는데도...
첫 회사를 통해 자아실현의 욕구 이전에 존경의 욕구를 충족하는 게 먼저라는 걸 확실히 배웠다.
첫 회사에서 일한 지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 때의 경험은 내 무의식에 엄청난 방어기제를 만들었다. 이렇게 좋은 회사에서 멋진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 없던 것을 목표로 일하고 있어도, 불확실한 도전을 앞두고 신중히 생각할 (어쩌면 그냥 걱정할) 시간이 여전히 필요하다. 긍정적인 것 보다 부정적인 것이 더 크게, 더 오래 남는다는 걸 이렇게 느낀다.
그래도 어느덧 첫 회사에서 보낸 시간보다 지금의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어졌다.
좋은 경험을 한겹 한겹 쌓아가면서 방어기제는 희석되어 가고 있고, 나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일로써 증명해낸다. 나는 어제보다 더 나아진 나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요즘 디자인을 하며 느끼는 감정의 시작점은 대부분 '타인'이다. 아직 중심이 단단하지 않아서 그런지.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그러면서 열등감을 느끼고, 이 길이 맞나 혼란스러워한다.
디자인을 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키워드는 '일'과 '나' 다. 관심이 가는 키워드다 보니 관련된 것들이 눈에 더욱 들어오는데, SNS를 할 때 '디자인 분야에서 자아실현을 하며 즐겁게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보이면 부러움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낀다.
또 요즘은 콘텐츠 온리의 시대. 어디서든 엄청난 양의 콘텐츠를 접할 수 있을뿐더러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플랫폼들도 많은 콘텐츠를 노출하기 위해 빠르게 확인이 가능한 형태의 UI로 바뀌고 있다. 따라서 콘텐츠 중에서도 빠르게 소비할 수 있는 숏폼 콘텐츠가 요즘의 트렌드인데, 디자인이나 영상 같은 시각매체는 '빠른 소비'를 피하기 어렵다.
디자인 트렌드 또한 이런 사회현상에 맞춰 의미보다 전달 속도가 빠른 감각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나는 본디 작업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주의라, 의미보다는 밀도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디자인 요소를 활용하는 게 쉽지 않다. 타입 하나를 배치하더라도 그렇게 배치한 이유가 필요한데, 논리 없이 감각만으로, '이게 예뻐 보이니까'라는 이유로 디자인을 하는 건 나에게 너무 어려운 과제다.
그런데 이걸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 많다. 논리보다는 감각을 살려 작업하는 (것 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고, 프로세스가 궁금하고, 또 한편으로는 '난 내 소신을 지켜 의미를 담은 디자인을 하는 게 맞는 거지' 싶다가 '그런데 사람들이 의미를 알아줄까? 그렇게나 빨리빨리 소비하는데?' 싶은 마음도 들고.
이것도 크게 보면 '나'를 찾아가는 과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 스타일을 구축해나가는 거니까.
나 자신을 알고, 중심이 단단해지면 지금과 다른 고민을 하고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겠지. 하지만 나를 찾는 일은 평생에 걸친 과업이라 어쩌면 나는 평생 이런 고민을 하고 살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는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전제 자체가 틀렸다.
불만족스러운 일과 만족스러운 일을 모두 해본 입장에서 말해보면, 워라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일에서 제대로된 만족을 느끼고 있지 못할 확률이 높다. (22살의 내가 그랬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일을
삶의 일부로 여기게 된다. 나는 일하는 게 즐겁다.
그렇다고 해서 퇴근 후와 주말에도 회사 일을 붙잡고 살지는 않는다. 그 시간에는 내가 하고 싶은 또 다른 일을 한다. 회사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자아실현의 욕구는 사이드 프로젝트나 취미로 채운다.
지금은 회사 일과 개인 프로젝트를 균형 있게 엮어나가고 있지만, 언젠가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 만으로 내 삶을 채우고 싶다. 막상 일을 해보니 어떤 일에도 귀찮은 부분은 있기 마련이라, 그런게 과연 가능할까 싶기는 하다.
디자인적 소통을 많이 하는 곳은 단연 지금 재직 중인 회사. 그리고 하나의 프로젝트에서 한 명의 디자이너가 디자인 DRI를 가지기 때문에, 논리가 충분하다면 프로젝트 팀원 모두가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준다. 물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때도 역시 내 논리를 상대에게 잘 설득한다면 일이 깔끔하게 진행된다.
일 이외의 것(사내정치, 탑다운 문화 등)이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소통이 아주 원활하다.
많은 회사가 이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대부분의 회사, 또는 본인의 사업에서는 본인의 업무보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더 큰 경우가 많다. 당장 첫 회사만 떠올려봐도 말이 달라진다. 그런 점에 있어서 지금 회사의 사내 문화와 업무시스템에 고마움을 느낀다.
첫 회사가 너무 큰 흔적을 남긴 탓인지 그 이후로 일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꾸준히 하고 있다. 처음에는 납작하게 탈디자인만을 생각했지만 디자인 신을 벗어나기에는 내가 디자인을 정말 즐기고 좋아한다. 나는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에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것을 선택했다.
지금 하는 일이 정말 좋기는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세상에 완벽하게 좋은 일이 있나 싶기도 하지만. 완벽하지 않기에 재밌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기왕이면 최대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고, 그러려면 디자인 외에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잘 알아야 한다. 언어가 생각(기의) 없이는 성립이 안 되는 것처럼, 디자인 또한 목적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 디자인을 잘 활용하면 과정도 즐겁고, 결과에서 오는 성취감도 배가 되겠지.
나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일과 함께, 디자인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어갈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디자인을 놓지는 않을 것 같다.
디자인은 나에게 있어 수단이다. 목적은 그때그때 다르고, 디자인도 그에 맞춰 그때그때 다른 스타일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 덕분에 뾰족한 취향은 없고,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완성도가 있다고 느껴지면 충분하다.
앞에서도 말했듯 지금 회사에서 DRI는 전적으로 디자이너에게 있기 때문에 취향보다는 만족도로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결과물의 만족도는 리소스를 얼마나 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리소스는 시간이 될 수도, 돈이 될 수도, 또는 그 이외의 것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들인 리소스와 결과물 만족도는 비례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