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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요우 Oct 20. 2021

먹고사니즘의 귀찮음

덜어내기

  앞서 말한 녹즙을 짜는 모습은 이제 잠시 자취를 감출 예정이다. 아2가 유아기를 벗어나고 아1이 아토피를 극복해나갈 무렵 귀차니즘이 엄습해왔다. 그동 세심하게 신경쓰며 보살펴온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엄마인 내 체력은 고갈되려 하고 있었다.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러하듯이 음식도 내가 들인 공에 비례해 만족도가 올라가는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들의 반응은 내가 세척한 채소의 양과 반비례했으며 귀차즘으로 구매해 죄책감으로 내놓은 인스턴트 정비례했다.

  채소의 세척과 손질, 보관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농약에 대한 우려로 양상추나 치커리, 케일 잎사귀들의 잎맥이 다 뭉그러질 정도로 하나하나 박박 닦고 베이킹 소다와 식초의 부글거리는 액체 속에 담근다. 반나절을 물과 사투를 벌이는 기분이다. 손끝은 온천욕을 다녀온 것처럼 쭈글해지고 건조함으로 갈라진다. 제철 채소가 좋고 오색 테라피로 건강을 챙길 수 있다는 만고의 진리는 손의 건강과 시간의 효용성 앞에서 처절히 무너져간다.

번거로운 방식으로 건강을 챙기기보다 간편하게 적당히 살기로 했다.

  살 수 있는 재료들을 사는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재료들을 사기로 했다.마처럼 뮤신이 많아 점액질이 손에 끈끈하게 묻어나거나 더덕처럼 흙과 껍질이 손에 진득하게 묻는 어려운 손질법을 가진 식재료는 멀리하게 되었다. 세척과 손질이 간편한 오이와 파프리카를 들이고 잎사귀는 거리를 두었다. 아이들에겐 어차피 다같은 이파리 채소일뿐 종류가 바뀌고 생략이 된다한들 별 감이 없을 터였다.

  이쯤되면 노력을 극진하게 기울이기보다는 정성을 덜 쏟고 그 시간에 내 몸과 마을 추스리며 휴식 취하게 아이들에게 향할  스트레스를 줄이는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고 비겁한 변명을 해본다)


  매번 반복되 일들 중 가사노동만큼 중요도에 비례해 부질없고 무용한 느낌을 주는 것이 또 있까 ?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의 관점이 아닌 일을 실행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이다. 순전히 그 일의 몫을 높은 지분으로 감당하는 사람의 입장에 들여보자면 가사는 육아와는 또다른 성격의 고단함 안겨준다.

육아와 양은 아이가 자립 수 있는 시점에 다다르면 을 떼도 괜찮을 것이라는 시점적 희망이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가사 유사하게 반복되는 작업 끝없는 릴레이로 진행해 나가야한다. 내 인생의 끝, 종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같이 종지부를 찍을 것 같다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게하는 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또 희한하게도 가사라는 일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그 일의 단계가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몇 개월 혹은 몇 주짜리 가사 프로젝트는 없지 않은가! 그저 유효기간이 당일이 한정되는 고강도 단기 노동이다. 원래의 상태로 복구해 놓아야하는 하루짜리 단순 노동 일자리란 말이다.

가사는 원형 보존의 법칙을 준수하는 일에 가깝다. 결벽증 정도의 수위는 아니더라도 까다롭고 예민한 성향을 지 사람은 완벽하게 물건의 위치와 각을 잡진 못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청결을 유지하려는 습성이 있다.

먼지 한 톨, 머리카락 한 올, 손톱 한 조각도 용납되지 않는 좁은 마음의 소유자인 나는 청소로 매일의 일과를 시작하며 문득 궁금한게 생겼다.

당췌 매일 청소를 하는데 어디서 그 많은 먼지들이 유입되는 것일까? 곰팡이가 번식하듯 먼지들도 자가번식을 꾀하는 것일까? 세포 분열이라도 일으키는 것일까? 이것만은 미생물의 과학대해 심도있게 파헤쳐보고 싶어졌다.


  다시 가사로 돌아가자. '가사'는 '노동'이란 말과 주로 상응해 쓰인다. 가사 작업, 가사 근로가 아닌….노동이란 단어 안에는 기본적이며 세속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생계 수단으로서 고통을 수반하는 행위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사회의 약자들이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싫어도 강제적으로 해야하는 일'이 노동인 것이다. 고귀한 예술 작품을 양산해내는 것, 회사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는 것, 아이를 훌륭하게 양육하는 것을 우리는 노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노동은 아무래도 육체의 고됨 국한될때 통칭해 부르게 된다.

  가사 노동은 그에 대한 기여도나 공헌도가 낮은 자들이 보기에 가히 힘들어 보일것도 없고, 가시적인 성과가 미미한 하찮은 궂은 일에 불과할지 모른다. 당연히 해내야할 마땅한 일인데 토를 달고 힘든 내색을 한다는 것이 민망할 지경이다. 업무를 분장하자고 요청하거나 불평을 한다는 것은 직무유기에 가까운 게으른 자로 비춰질 우려도 크다.

껄끄러운 관계의 상사와 식사나 회식을 할 일도 없고, 언성높여 회의를 할 일도 없으며 눈치보며 퇴근할 일도 없이 안락하고 편안한 내 집에서 마음대로 스케쥴을 조정하며 설렁거리며 일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집에 모셔오고 싶다. 한달 동안 내 일을 전가시켜 주며 안락하고 평화로운 가정, 풍요로운 식탁과 청결한 집안을 위한 노동에 박차를 가하게끔 진두지휘해주고 싶다.

사실 나도 직장다닐때는 그런줄 알았다. 전업이 되며 애써 외면했던 진실을 마주했다.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가사를 제법 익숙하게 해나갈 무렵 또다른 갈등이 찾아왔다. 이번엔 상대적 박탈감과 자격지심 같은 일종의 내적 갈등이다. '내가 겨우 이런 일 하는 사람으로 전락했다'는 피해의식, '이러려고 남들과 경쟁하며 공부했던가'라는 억울함만 남은 자괴감 비슷한 것이다.

"애들 다 크면 다시 일할거지? 여자도 일을 하는 세상인데…"

  가끔 주변희망고문까지 더해지 가만히 정체되어 있는 나에 대한 질책으로 들려 괜스레 주눅이 든다. 진짜 업무라 부를 수 있는 일을 시작할때까지 임시로 하는 것이라며 자기 암시를 걸고는 한다. 비뚤어진 자존심이 가사 노동 앞에서 바닥을 내비친다.

  분명 선조때와는 차원이 다른 진보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가사가 단축된 수혜를 받고 있는데도 만족감은 그만큼 늘지를 않는다.


  이런 모든 감정을 해결하지 못한채 떠안은 상태에서 묵묵히 해나가고 있다. 내가 안하면 결국은 누군가에게 불편할 일이기에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작업을 시작해본다. 오늘도 당일의 몫을 톡톡히 해내며 시간을 알차게 유용했다고 스스로만 아는 위로를 건네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는 인정하고 응원해주기로 한다.

  여유와 휴식이라는 무형의 대가와 소득은 내가 노동을 멈추고, 분리하고, 솎아내지 않으면 쉬이 손에 잡을 수 없음을 알기에 잠시 가열찬 노동을 멈추고 티타임 갖는다. 그리고 또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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