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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요우 Dec 17. 2021

합리적 소비

참아내기

  합리적 소비란 말을 좋아한다. 늘 입에 달고 살던 이 단어가 실제로 존재함을 알게된 건 아들1의 6학년 사회 문제집을 채점해 주었을때였다. 학문적 정의에 따르면 '가계가 소득의 범위 안에서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만족을 얻도록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 나름의 정의는 '스스로에게 가성비, 가심비를 제공하는 한도내에서 궁상과 알뜰로 자기만족을 일삼는 소비행태'이다. 내가 생각하는 궁상은 주책맞게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구질구질한 것이 아니다. 부당하거나 억울한 소비가 되지 않는 선에서 본인만 느낄 정도 알뜰살뜰함을 향한 살짝 과한 집착까지 허용치로 두겠다는 의미이다.

내가 행하고자 하는 바람직한 소비는 무조건 아낀다는 명목하에 구매를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 전환과 필요가 적절히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적당한 선의 구매하는 것이다. 원하는 물건이 부담되지 않는 선이라면 지출을 감행하고 꼭 사야될 물건은 가급적 최소한의 시간 투자로 는 것이다. 최저가를 고집하며 고군분투하는 시간의 허비도 잉여에 가까운 일이므로 타협점을 찾겠다는 것이다.

할인을 하면 소비를 늘리고, 얼마 이상 구매시 혜택을 준다면 카드의 지출을 서슴치 않고 감행할 준비가 되어있다. 지금 당장 필요가 없더라도 조만간, 언젠가 쓰게 될 것이므로 겠다는 것이다. 물건을 사면서 얻는 혜택도 곧 내 지불한 판매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기에. 싸게 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필한 시기에 적절한 가격으로 매입하는 것이 보관 공간 활용면이나 가정과 국가 내수 경제의 활성화에 이바지하는 이라고 믿기에.


  철저히 수치를 록하고 계산며 가계부를 써내려갈 위인은 못 된다.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그 바운더리안에서 최소한의 필요, 절제된 욕구에 의한 소비를 행하려 애쓰지만 미적 욕구와 풍족한 삶을 향한 욕망이 앞설때가 더 많다. 의지로 억제할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르면 자제령을 내려도 속수무책이다. 지독한 억제는 엉뚱한 분출을 가져오는 법. 그때그때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보이면 마음이 이끄는대로 따른다. 이어트를 앞두고 먹방을 보고, 바이러스의 역습으로 방구석 세계여행을 즐기듯 일종의 대리 만족과 치팅 소비가 필요한 법이다. 비록 명품관 오픈런 행사에 줄을 서진 못하더라도 적절한 쇼핑으로 소소한 소비욕을 잠재워야 한다. 그럴때는 합리를 내려놓고 절충적 소비를 행한다. 나름의 호사로운 사치 소비인 것이다.


  나이가 들면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치장해야 추레해보이지 않을 거라고 종종 생각다. 더이상, 아니 원래부터 빛나는 젊음으로 커버될 외양은 아닌 편이라 여겼다. 패션을 업으로 삼은 마당에 아무래도 비루한 육신에는 명품이라도 휘감아야 하지 않겠냐고 변명하듯 되내었다. 그렇다고 고가의 물건을 마구잡이로 인건 아니었다. 집에선 아들1이 입다 시보리가 늘어나고 작아진 MTM과 트레이닝을 일상복으로 착용했다. 마치 심폐소생하듯 생명연장의 일환이었다.

외출용으로는 어마무시하게 많은  아이템들을 수집하듯이 사들였다. 외관을 변화시키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지만 한계점 있었고 어느 순간 공허함이 밀려왔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미적 감각을 중요시하는 몇 십 해를 살아온 나는 그 업을 떠나며 심미안을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디자인을 후순위로 밀어놓고 기능성과 내구성, 가격대를 고려하는 편이 그나마 실속이라도 챙기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간혹 당근앱에서 하트를 표시한 제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중고를 들이는 것에 더이상 꺼림직하거나 망설이 않기로 했다. 내가 아껴주는 석유가 얼마나 많은 배럴일지 상상해 본다. 폐기 처리되던 패스트 패션을 양산해내던 나는 자발적으로 그 일에서 걸어나오고, 그러면서 생각의 관점을 달리해 소비하던 패턴까지 변화를 주고 있는 셈이다. 새로 제작된 물건을 사들이는 것에서부터 쓰임을 다한 물건의 순환에 대한 문제까지 생각해다. 어쩌다보니 수명 연한이 다 된 물건의 사후 처리까지 고민하는 수순까지 이르렀다.


  파리에는 그리니에 프리마켓이 있다. 거창하게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귀중한 골동품까지 발견할 수 있는 클리냥쿠르나 방브앙같은 벼룩시장이 아니다. 그저 지역 주민들끼리 소소하게 바자회를 여는 것이다. 아무것도 사지 않고 어슬렁거려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고 극심한 호객 행위도 없을테다. 거기에선 아마도 한 철밖에 못 육아용품이나 아동서, 장난감, 수제 쿠키 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집에서 짧게 소비된 뒤 잠들어 있을 물건들이 값어치를 아는 누군가들에게 전해져 소생할 수 있는 바자회가 활성화되면 어떨까?

중고로 물건을 들이는 것은 전 주인이 함께한 시간까지 좋은 마음으로, 덤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사유하고 소유하던 물건의 왕래를 통해 긴요한 타인에게 쓰임의 명맥유지된다. 간소하게 정돈된 집, 후련한 마음과 필요에 의한 합리적 소비를 했다는 뿌듯한 보람이 오가는 것이다. 친환경적인 가치 소비의 경험치가 쌓이는 일은 꽤 매력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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