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없다고 믿기에 MBTI나 기타의 무슨 테스트들이 크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러면서 또 다 해봄 ^__^) MBTI가 사람들의 성향에 대해 나누는 게 그래도 나름 잘 맞는 것 같다. 물론 그 어느 누구도 100% 어느 한쪽 성향일 수는 없겠지만 어떤 성향이 더 강한지 정도만 알아도 그 사람을 파악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 그중에서도 차이점을 많이 느끼는 게 T와 F이다. Thinking(사고)과 Feeling(감정)의 앞글자를 딴 것으로,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사실 및 현상을 중시하는지,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중시하는지 완전 딴판의 반응을 보인다.
인터넷에도 T와 F 차이를 검색해보면 재미있는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 공감 가는 사진 하나. 친구가 '나 힘들게 돈 모아서 아이패드 샀어'라고 말했을 때, F는 '힘들게'에 집중, T는 '아이패드 샀어'에 집중.
나는 물론 감정 없는 로봇은 아니지만 F보다는 T의 성향이 훨씬 강한 편이다. 특히 공감능력이 좀 부족한 편. 나는 친구가 남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할 때 '괜찮아?'가 아니라 '왜? 어쩌다가?'를 물어보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 시험 끝나고 친구들이랑 엄청 슬픈 영화를 보러 갔는데 나 혼자만 울지 않아서 비슷한 상황이 있을 때마다 나 혹시 소시오패스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무튼 T와 F를 왜 이렇게 길게 설명했냐면, T 성향이 강한 나는 웬만하면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보고 울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최근 그런 나의 눈물샘을 자극한 드라마가 있었으니, 바로 <나빌레라>이다. 그러니까 이 지독한 T를 울릴 정도의 강력한 작품되시겠다.
*덧, TMI지만 내가 보고 운 영화가 몇 개 안돼서 기억하는데, <집으로>와 <1987>이 있다.
<나빌레라>를 이미 웹툰으로 봐서 내용을 알고 있었는데도 영상으로 보니 좀 더 생생하게 다가와서 그런지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사실, 사람에 따라서는 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아버지가 더 이상 기억을 잃기 전에 어린 시절부터 꿈꾸었지만 현실의 장벽에 막혀 포기했던 발레에 뒤늦게 도전하고, 그 길에 목표의식이 없었던 천재 청년이 함께 하며 서로 자극이 되어 같이 성장하는 이야기. 할아버지와 천재 발레리노 각자의 가족에게 벌어지는 상황과 그 사이에 피어나는 가족애, 그리고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 그럼에도 <나빌레라>가 작품성도 인정받고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진 것은, 발레라는 소재의 특이성과 어쩌면 뻔할 수 있는 이야기도 사람 냄새나게 잘 풀어낸 글작가님의 공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부러운 글 솜씨. 더 늦기 전에 뭔가에 도전한다고는 하는데, 예를 들어 달리기나 그림이었으면 가족들이 춤바람 났다고 반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나만해도 백발의 노인이 발레복을 입은 장면을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주인공인 덕출 할아버지나 채록이보다도 호범이와 해남 할머니에게 자꾸 눈이 갔다. 호범이는 고등학생 시절 채록이 아버지가 감독이었던 축구부에서 채록이와 함께 뛰었었다. 하지만 채록이 아버지의 잘못으로 축구부가 해체된 후 채록이 아버지를 원망하고 채록이를 괴롭히며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축구부 해체로 똑같이 길을 잃었지만 과거에 매여있는 자신과는 달리 앞으로 나아가는 채록이를 보면서, '너도 다시 날아오를 수 있다는' 덕출 할아버지를 만나고서 다시 축구에 도전하는 캐릭터이다. 사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을 원망하면 너무 쉽다. 하지만 남을 원망하면서 과거에만 매여있기보다는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내디뎌야 한다. 호범이를 보면서 느끼는 게 많았다.
너무 훌륭한 어른들이라 이런 어른들은 어디서 만날 수 있나 생각이 들게 만든 덕출 할아버지와 해남 할머니.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발레 배우는 것을 반대했지만, 춤바람 났냐는 동네 사람들의 위로 아닌 위로에도 우리 성산 아버지는 춤바람 난 게 아니라 예술을 한다며 나중에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응원해준 할머니는 채록이에게도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생만 하다 병이 난 남편, 바람 잘 날 없는 자식들, 그리고 채록이까지 다 보듬고 아우르는 구심점이다. 나중에 나도 저렇게 단단한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실제로 내가 울음이 가장 크게 터진 부분도 애써 할아버지의 병을 모른척하고 티 내지 않으며 담담하게 지내던 해남 할머니가 막내아들에게 같이 살기 위해 집으로 들어올 필요 없다고, 책임질 수 있다고 하는 장면이었다. 뜬금없이 왜 거기서 울음이 터졌는지 모르겠다.
종종 나는 벌써 곧 30대 중반이고 뭘 하든 이미 늦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나빌레라>를 보면서 환경 탓 그만하고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탁구 신동 신유빈 선수와 경기했던 노장 니 시아리안의 인터뷰가 생각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