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후 5개월 만에 첫 육아 그리고 간호
아이를 처음 병실에서 만나고 내가 아이를 오롯이 돌본 첫 1주일이 나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너무나도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게 생소하고 무서운 알 수 없는 것들이 아이 몸에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거대한 호스가 아이 목에 난 구멍에 연결되어 있고, '위잉-칙'하는 소리를 끊임없이 내뿜는 인공호흡기계는 아이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체감상 내 엄지 손가락보다도 작은 발에는 아이의 산소포화도와 심박수를 체크하기 위해 센서가 칭칭 감겨져 있고, 아이 가슴에 박혀있는 중심정맥관에는 아이의 영양을 책임져주는 TPN이라는 그 당시에는 잘 알지도 못했던 액체가 들어가고 있었다.
인큐베이터에서 병실 침대에 아이를 눕히는 데 수많은 선들 때문인지 아이의 상태가 위중해서인지 간호사 선생님이 3명이나 달라붙어서 정리하고 또 정리를 했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서로 인수인계 하듯 아이의 상태를 공유하고, 나에게도 분명 무언가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 상황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만 보는 게 전부였다. 남편이라도 같이 있었다면 조금은 나았을까, 코로나로 인해 보호자는 1인만 상주가 가능했고 이 모든 상황을 나혼자 감당해야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고 버거웠다. 그날의 난 아이를 안아본적도 만져본적도 없는 육아도 간호도 모든게 처음인 쓸모없는 엄마였다.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 아이는 세상에 처음보는 것들이 한 가득일텐데도 눈동자는 한곳에만 고정되어 움직임이 없었다. 그 모습이 이상해 보일 법도 한데.. 근육병 아이가 나름 최선을 다해 움찔움찔 움직이던 손과 발들의 미세한 움직임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엽게 느껴졌던 건 내가 엄마이기 때문일까.
첫 날밤, 난 단 1시간도 잠을 잘 수 없었다. 내가 눈을 감으면 내 눈 앞에 있는 작은 생명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가 잠들어도 나는 잠이 들 수 없었고, 아이를 한 번 보기도하고 포화도와 심박수가 표시되는 기계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조용히 아이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이 잘 뛰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아이와 일반병동 생활하면서 여러가지 순간들이 있었지만 시작부터 난감한 일이 생겼었는데, 그건 바로 엑스레이를 찍는 것이었다. 아이는 여러 기계를 달고 있기 때문에 침상에서 엑스레이를 찍어야 했고, 아이 밑에 엑스레이를 찍기위한 판을 깔아야 하니 아이를 살짝 들어올려야 했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를 한번도 안아본 적이 없었고, 아이는 일반 아이와는 다르게 온몸이 축 늘어지는 아이였으며 너무 많은 선들이 아이와 연결되어 있고.. 이런 아이는 어떻게 안아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었다.
"간호사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 제가 아이를 안아본 적이 한번도 없어서요..."
"네? 아..네! 제가 ,,! 제가 할게요. 어머님"
나의 그 말에 간호사 선생님은 잠시 당황하셨지만.. 결국 아이는 간호사 선생님 2명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엑스레이를 찍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모든게 처음이었지만 여러 도움을 받으며 적응을 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일반병동으로 올라온지 몇일 되지 않아서부터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는 산소를 0.5L만 줘도 충분했는데 필요한 산소량은 점점 증가했고, 맥박은 매일 최고치를 찍으며 모니터기계에선 하루도 알람이 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호흡기과 교수님과 심장과 교수님까지 협진에 협진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아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이의 상태가 나빠지면서 석션을 하는 횟수는 더 많이 늘었고, 나는 쉴새없이 석션을 하기 위해 식염수통을 까고 또 까느라 손 피부가 벗겨져 피가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일주일이 되는 날 아이의 맥박이 200이 넘어가고 산소를 3L를 넘게 주는데도 포화도는 오르지 않았으며 아이는 온몸이 새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어했다. 아이 좀 살려달라고 나는 애처롭게 간호사 선생님을 부르며 울부짖었고, 아이는 호흡기과 교수 2명과 심장과 교수 1명, 수간호사님과 응급대처가 가능한 간호사선생님들까지 수많은 의료진들에게 둘러쌓였다.
너무나 무서웠다. 이 모든 상황이 다 나 때문인 거 같았고, 일주일간 잠을 못잔 탓인지 아무것도 거의 먹지 못한 탓인지..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이대로 그냥 도망갈까? 지금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정신이 아득해진 상태로 나는 계속 울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의료진들이 아이를 보고 갔음에도 아이의 상태가 왜 나빠진건지 원인이 무엇인지 찾지못했다. 결국 처방은 네블라이저를 더 열심히 돌리고, 더 열심히 석션을 하라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돌아가고 여전히 산소는 평소보다 많은 유량이 들어가는 상황에서 간호사 선생님은 나에게 네블라이저를 주며 하루 몇 번 하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순간 나는 무너져버렸고 간호사 선생님께 울고 불고 소리치며 이야기 했다.
"저 못하겠어요. 선생님, 살려주세요 선생님. 제발요 저 더이상 못하겠어요"
간호사 선생님은 잠시 당황하시는 듯 했지만 이런 상황에 익숙하신 듯 차분하게 나에게 이야기 했다.
"어머님 조금 진정하신 후에 나중에.. 나중에 하셔도 되요. 어머님 지금 너무 잘하고 계세요. 어머님이 힘을 내셔야 해요. 제가 있다가 다시 올게요. 조금 쉬고 계세요"
조금 진정하고 네블라이저를 돌리며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데 또 다른 새로운 호흡기 담당 교수님이 오셨다. 아이의 인공호흡기 기계 셋팅을 이리저리 만져보시더니 기계가 맞지 않는 듯 하다며 기계를 다른 걸로 바꾸고 셋팅값도 다시 보기위해 중환자실로 가야할 것 같다고 하셨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나온지 일주일만에 다시 이번엔 소아중환자실로 입원이라니.. 난 분명히 슬퍼야만 했다. 근데 난 사실 홀가분했다. 그래 그게 사실이다. 물론 아이가 정말 심각한 응급상황에서 중환자실로 가야한다 했다면 마음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공호흡기 기계를 다른 걸로 바꾸고, 셋팅을 조절하려면 중환자실로 가야하니까 가는거라고 나를 안심시켜주시려 하시는 말에 나는 안심을 해버렸다. 그리고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만약 이대로 계속 아이와 함께 있었다면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그날 바로 중환자실로 갔고, 나는 엄청난 속도로 짐을 싸고 집으로 향했다. 울고 불고 못하겠다고 소리치던 내가 짐은 어찌나 빨리 챙기던지 그런 내가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단 한순간도 더이상 병원에 있고 싶지 않았다.
5개월만에 처음으로 내가 직접 육아와 간호를 함께한 일주일.. 나는 꾸벅꾸벅 잠깐씩 졸았던 것 외에 잠든 기억이 없고, 두유 몇모금, 카스테라 몇개 정도 먹은게 거의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만에 6키로가 빠졌다.
아이를 중환자실에 보낸지 3일이 지나고, 기계문제가 아닌 보카바이러스에 걸려서 생긴 문제임을 알게되었다. 10일 후 나는 아이와 일반병동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