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을 읽고
새해를 맞아, 돈 공부를 해보자 하는 다짐을 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증권사를 찾았다. 금융기관을 직접 찾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방문 이유를 이야기하고, 본인 확인을 하고, 투자 성향 체크하고 싸인 몇 번 하면 끝나는 형식적인 자리. 그런데 직업을 확인하는 항목이 있었다.
“혹시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라고, 주임 정도 되는 직원이 사무적으로, 하지만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아, 주부에요”
라고 이야기했고, 순간 뭔지 모를 감정이 들었다.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드는 부끄러움이랄까.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주부라는 단어에 우겨넣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 그런 묘한 감정이었다. 수년간,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일 했던지라 당연히 스스로 주부라고 생각했고, 무가치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 자부했는데, 막상 공적인 자리에서 나를 당당하게 주부라고 소개할 만큼은 아니었나보다.
내 앞에 있는, 단정하고, 포멀한 옷차림을 한, 누가 봐도 머리부터 손톱까지 ‘관리한’ 여성 앞에서,
부스스한 머리는 질끈 묶고 동네 패션으로 장바구니를 끼고 온 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집에 있다 나온’ 여성의 모습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다, 그런 외적인 것이 핵심이 아니었다. 금융기관이라는 곳의 특성상, 직업 확인이라는 절차가 필요했고, 나는 ‘나는 주부이기에 타인이 벌어오는 재화에 기대어 신탁합니다‘ 를 확인하는 그 짧은 순간 무능함을 느꼈던 것 같다. 무의식중에 나의 콤플렉스나, 자기 연민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라 해도 할 말은 없다. 허나, 일반적으로 ’주부‘라고 하면 집에서 노는 여자, 별다른 노력 없이 남편의 경제력으로 소일거리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것은 사실이고 나는 그 관념을 공적으로 확인했다고나 할까.
내가 하는 노동의 가치가,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는다면 ’주부입니다‘라는 말을 할 때 이런 감정이 들지 않을텐데.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가시적인‘, 즉 경제적인 보상이 있다면, 이런 괜한 느낌에 휩싸이지 않아도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이런 나의 답답한 마음을 조금은 해소해준 책을 만났다. 정아은 작가의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은 가사 노동이 ’집에서 노는‘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 15권의 책을 통해 사회, 역사, 경제적 배경을 파헤치고 있다. 저자도 말한다. 결국, 핵심은 돈에 있다고. 과거에 비해 상승된 여성의 지위는 여성운동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며, 돈이 여성을 누르던 수많은 제도와 관습을 일거에 무너뜨렸다는 것을 꼬집는다. 가족의 의식주를 보듬어야 하는, 양가의 대소사를 챙겨야 하는 기혼 여성에게, ’회사 가야 한다‘는 말은 그런 온갖 가사들로부터 공식적으로 해방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말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이렇듯 막강한 돈의 힘은 여성에 대한 낡은 관습을 깨버리는데 까지 이르렀다.
저자는 주부의 노동, 가치를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며,
’돌봄 경제학‘ 학자인 미국 경제학과 교수 낸시 폴브레의 ’보이지 않는 가슴‘ 이라는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변되는 현대 경제학이 인간에게 내재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 욕망만을 조명하고, 그 욕망의 결과물만을 수치화하고 연구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한 인간이 노력해서 성공적으로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 인간의 배고픔, 추위, 외로움, 슬픔을 감싸 안아주고 토닥여줄 ’가슴‘이 필연적으로 동반되는데 경제학은 그 부분을 전혀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을 키워내기 위해 수많은 돌봄 노동을 해내는 ’가슴‘은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되고, 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금전이 최고 가치로 군림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기적 욕망에 충실한 이들이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명예를 누리는 동안, 남을 돌보는 이타적 가치에 충실한 이들은 최소한의 금전적 보상조차 받지 못하는 약자가 되어버리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듯 돌봄도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딛고,
마침내, 여성운동가 실비아 페데리치의 국가가 가사 노동에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른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뿐 아니라 노동자가 건강한 심신을 유지하기 위해 재생산하는 주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사회에서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주부들에게 임금이 지급되어야 상황이 바뀐다고 주장한다.
처음에 이 책에서 이 개념을 접했을 때, 나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힘든 주장이며(시급은 어떻게 측정할 것이고, 주부의 노동 시간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오히려 가사 노동에 함의된 가족을 위한 노동이라는 의미를 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요즘 내 주위의 주부들은 대개가 20, 30대에 일을 하다가 결혼, 육아로 그만둔 경단녀들이다. 그녀들은 이미 스스로 버는 돈의 힘을 몸소 깨우쳤던 세대인 것이다. 그런 그녀들에게 가사 노동이 ’일‘로 인식되게 하려면,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보상이 있다면 가사노동의 가치가 제고될 것이고, 주부는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제 손으로 돌보지 못하는 엄마들도 (그 보상이 비록 단돈 몇푼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을 계기로) 가정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절벽에 대한 해결책도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엄마들 뿐 아니라, 아빠들도 원한다면 가사 노동을 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글을 쓰면서도, 이런 주장이 현실화 될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엄마는 언제, 어디서나 무상으로 가사노동을 당연히 하는 사람이라는 관념이 너무나 공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나는 더이상 '주부입니다'는 말에 묘한 울적함에만 빠져있지 않게 되었고, 자기 방어조로 '나 집에서 놀잖아'라고 자신을 비하하지 않게 되었다.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고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무가치해 보이는 가사 노동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고, 그 노동에서도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주었다.
내가 낳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따끈한 음식을 호호 불어 몸을 덥히고 그 온기를 함께 나누는 순간, 아이의 숨결과 내음을 마음껏 맡는 순간, 각자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듣는 순간. 그 순간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그걸 넘어서 '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오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