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빛달 May 25. 2023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

<버지스 형제>를 읽고.

독서모임 멤버들과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책을 한달에 한권씩 읽고 있다.

그녀의 섬세한 감성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책들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움이 차오르곤 한다.

<올리브 키터리지>, <다시 올리브>, <에이미와 이저벨>을 읽고 네번째 책 <버지스 형제>를 만났다.

그 전작들과는 달리, 버지스 형제는 난민과 인종차별 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셜리폴스라는 작은 도시에서 자란 짐과 밥, 수전이라는 삼남매.

이들은 비극적인 사건을 딛고 자라난다. 아이들이 타고 있던 차가 내리막을 내려오면서 아버지가 차에 치어 사망하게 된 것이 그것이다. 밥은 그 차를 운전했다는 이유로 평생 자책을 하며 살아가고, 나머지 남매들 역시 그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애증과 자책, 후회 등이 씨줄과 날줄처럼 얼기설기 섞인 채로 관계를 유지하던 그들에게 어느날 또다른 큰 사건이 일어난다. 수전의 아들인 잭이 이슬람 사원에 돼지고기머리를 던진 것. 잭은 증오범죄 및 인종차별이라는 이유로 법의 심판대에 서게 되고 짐과 밥은 궁지에 몰린 잭과 수전을 위해 여러 노력을 하게 된다.

셜리폴스라는 작은 마을에 어느 날부터인가 내전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친 소말리족들이 많이 정착하게 되면서 마을엔 내홍이 생기기 시작한다. 한 여자는 신문에 "그들은 다른 언어를 쓰는데, 나는 그 소리가 싫다. 나는 메인 억양을 사랑한다. (중략) 이 억양은 사라질 것이다. 이 상황이 우리를 얼마나 바꾸어 놓을지 생각하면 무섭다" 라는 기고문을 썼고. 다른 한 쪽에선 사회복지사들이 소말리족의 말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내려는 노력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돼지머리 사건이 생긴 후 상황은 급변한다.


이제, 그 모든 노력 끝에 돼지머리 사건이 기사화되어 주 전체와 온나라와 일부 외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셜리폴스에는 거대한 파도가 강둑을 넘어 마을을 휩쓸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갑자기 셜리폴스는 편협하고 무섭과 인색한 장소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언뜻 보면 세상은 가해자와 피해자. 지배받은 사람과 지배하는 사람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소말리족에겐 백인=악으로 보일수 있지만, 가해자인 잭 역시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미성숙한 아이에 불과했다. 겉으로 보이는 인종, 종교, 지역 등으로 사람을 나누는 것은 인간의 편의를 위함일 뿐인 것이다.


우리 나라 역시 단일민족이라는 수식어가 시대착오적일 정도로, 외국인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몸을 써야하는 직종(건설, 이사, 식당, 농업 등등)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없으면 일이 진행이 안된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들을 과연 얼마만큼 받아들이고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대학원 교환학생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지내는 동안, '불어를 못하는 아시아계 여자'로 살면서 받은 부당한 혹은 억울한 일들이 마음에 남아 있어 더욱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듯하다. 한국에서는 평범하지만 남부러울 것 없던 내가 그곳에 가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면서 크고 작은 사건들에 휘말렸다. 물론 친절하고 호의적인 프랑스사람들도 많았지만 말이다.


하루는 친구(한국인 여자친구)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고 있는데 집시들이 와서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꽂고 있던 핀을 뺏으려고 하질 않나 일부러 우리 몸을 툭툭 건드리질 않나. 대낮에 지하철에서 아무 이유없는 시비라니. 우리는 소리도 질러보고 같은 칸에 탄 사람들에게 도움도 청해봤지만, 아무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를 정신없게 하던 그 집시들이 내리고 난 후, 우리는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갑이 없어졌다는 사실도 막막했지만 더욱 슬펐던 건,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주의가 강한 문화권이라서.. 라고 생각하고 지나기엔 몸과 마음의 상처가 작지는 않았던 사건이었다.  


이 책도 선진국이라는 미국이 겉으로 표방하는 가치와 그 이면에 감추어진 차별과 몰이해가 부딪히는 순간을 잘 포착하고 있다. 평화를 위한 집회가 열리는 공원에 모인 백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소말리족에게 상냥하게 웃음 짓고 다양성을 부르짓는 연설에 환호한다. 하지만 그들은 생존을 위해 도망친 소말리족의 절박함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어쩌면 이해하고 싶어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그저 백인의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환호할 뿐.


그럼에도, 이 책은 희망을 그려낸다.


공판이 열리던 날 그가 법정에서 본 키 크고 비쩍 마르고 눈동자가 검은 청년은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중략) 압디카림은 그 청년에게 마음이 갔고 그 마음은 그날 법정에서 저만치 있는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청년을 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전에도 압디카림은 신문에서 그 청년의 사진을 봤지만, 실제로 변호인 옆에 서있는 모습과 이어 증인석에 앉아 물잔을 넘어뜨리던 모습을 보고는 조용히 놀랐다. 실제로 눈을 보기 전에 어떻게 상상했었는지 생각났다. 땅을 덮은 차갑고 하얀 것. 하지만 눈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처음 본 그날밤 눈은 고요하고 섬세하고 신비로 가득했다. 그리고 여기 살아 숨쉬는 청년. 무력하게 공격에 노출된 검은 눈동자의 그 청년 역시 압디카림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렇게 가해자가 악 그 자체가 아님을. 그저 약한 한

사람일 뿐임을 받아들이고 용서해주는 과정이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과연 우리와 다른 존재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 앞에 살아 숨쉬고 있는 누군가를. 가족, 친구, 심지어 우리 자신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글을 읽노라면,

사람 한명 한명이 꽃송이처럼 느껴지곤 한다.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꽃도 있고, 그저 지나칠 수 있는 화려하지 않은 꽃도 있지만  꽃잎들을 한겹한겹 떼어내다보면 결국 남은 것은 희망이고 사랑인. 그런 꽃들. 그리고 그런 꽃들이 함께 아름다운 꽃밭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그려낸다.


결국, 그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프롤로그에 이 한 줄 이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매거진의 이전글 알바와 집안일, 글쓰기 사이를 오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