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빛달 Aug 26. 2024

내 안의 빛을 다시 찾고 싶은 그대에게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

한때 자신도 빛날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있었다.

남들보다 책을 좋아하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정 덕에 곧잘 학교에서 칭찬을 받을 때 자신에게도 빛이 있음을 깨달았고,

운이 좋았던 덕에 교환학생으로 해외에서 다른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더 큰 세상에 빛을 내고 싶은 마음도 가지게 되었다. 그런 믿음 덕분인지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몸에 잘 맞는 스커트와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광화문을 거닐 때, 그녀 안의 빛은 아마도 가장 활활 타올랐으리.


그러나, 그런 그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며 경단녀가 된 지금. 그녀는 자주 자신에게 묻는다.


네 안엔 아직도 빛이 있냐고.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었음에도.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어 스스로 할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고, 그럼에도 자주 손이 가는 일이 있어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누군가를 위해 쓰여지고 남은 듯한 짜투리 시간 밖에 없을 때. 그리하여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을 때. 그녀는 무력감에 휩싸이고 만다.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았겠지만, 이 전형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나이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알고 느끼고 살아가는 세상이 점점 좁아지는 느낌.

친구들, 회사동기들, 업무관계자들 등등 다양한 곳을 종횡무진 오가며 만나던 사람들의 폭이 점차 줄어들어 결국엔 가장 편안한 동네 엄마들 몇만 남은 인간관계.

아이들을 여기저기 실어나르고 나면 남은 에너지는 결국 집 쇼파에서 쏟게 되는 일상들.


매일매일 먼지처럼 쌓이는 그런 일상들 속에,

이 책을 만났다.


"명심하시오, 백작.
만약 한 걸음이라도 호텔 바깥으로 나간다면 당신은 총살 될 테니까."


1922년. 혁명의 격동이 할퀴고 지나간 러시아.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 경마 클럽 회원, 사냥의 명인인 서른세살의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은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 밖으로 평생 나갈 수 없다는 '종신 연금형'을 선고받고 스위트룸에서 허름한 하인용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런 구시대의 귀족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그런 세상의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호텔에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식당 요리사, 지배인, 데스크직원, 수선실 직원 등과 친구가 되고, 니나라는 꼬마 숙녀와 호텔 곳곳에서 함께 노는 것에서 모자라, 유명배우의 연인이 되며, 공산당 간부에게 과외를 해주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호텔이 그의 세상의 전부가 된 백작은 남은 여생을 어떻게 보내게 될까?


그는 때로 절망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결코 자기 연민에 갇혀 자신의 과거에 사로잡혀있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

구시대의 상징이 된 '백작'이라는 칭호 하에 거드름만 떨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품위는 지키는 우아한 존재인 그는, 이제 메트로폴 호텔을 세상 삼아 그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니나는 상갑판에서 바라본 전망에 만족하지 않았다. 밑으로 내려갔다. 뒤로도 갔다. 여기에 가고 저기에 갔다. 니나가 호텔에 있는 동안 벽은 안으로 좁혀오지 않았다. 오히려 영역과 복잡성이 모두 확대되면서 밖으로 팽창했다. 니나가 이곳에 온지 첫주가 지났을 때 호텔은 두 구역의 삶을 포괄할 정도로 팽창했다. 첫달이 지났을 때는 모스크바의 절반을 아우를 정도로 팽창했다. 만약 니나가 이 호텔에서 충분히 오래 지낸다면 호텔은 러시아 전체가 될 것이다. p. 94
"역사학도로서, 그리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진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 내몰리는 것과 상황을 잘 감수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p.338
알렉산드르 로스토프는 과학자도 아니고 현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순넷이라는 나이를 먹은 그는, 인생이란 것은 성큼성큼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만큼은 현명했다. 인생은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 주어진 하나하나의 순간마다 천번에 걸친 변화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우리의 능력은 흥하다가 이울고, 우리의 경험은 축적되며, 우리의 의견은 진화한다. 소량의 후추가 스튜를 변화시키듯,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p. 630


평생을 호텔에 감금된 상태로 살라는, 잔인한 선고를 받고서도

한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행복과 자기 자신의 자유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백작의 태도가, 마음에 많이 남았다.


결국

내 세상을 좁게 만든 것도 나였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제한한 것도 나였다.

스스로를 호텔보다 더 작은 세상에 가두고 자기 연민에 빠져있던 것은 나였다.


앞서 했던 질문을 다시 스스로에게 해본다.


네 안엔 아직도 빛이 있냐고.


글쎄,

당장은 아이들과 남편이 빛날 수 있도록, 뒤에서 빛을 내주는 역할을 하겠지만.

누가 알겠는가 언젠가는 내 안의 빛이 세상에 비쳐나갈 일이 생길지도.

그러기 위해 내가 처한 상황을 잘 감내하는 매일매일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지.  


백작이 자기 안의 빛을 잃지 않고 다른 이들을 빛나게 해주며 마침내 스스로 그 빛을 꺼내어 보였던 것 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