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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하게 Nov 20. 2020

딱쟁이

최근 철야가 잦은 가운데 윗입술에 포진이 생겼다. 처음에는 톡톡 두드리는 모양이 조신해서 몰랐는데, 하나둘 보글보글 모양이 나오더니, 급기야 부글부글 끓어버리더라. 나중에는 아주 넘쳐서 결국 진물인지 뭔지 아무튼 그런 게 터져 흘렀다. 그제야 약국서 급하게 약을 발랐는데, 신기하게도 얼마 안 있어 저녁에는 딱쟁이가 잡혔다.


늦게 집에서 요리조리 돌려보는데 아무래도 모양새가 속상하다. 일절 당사자와 협의 없던 것부터 성질머리 상스럽다 싶었는데, 쓰는 심보마저 고약해서 앉은자리도 지멋대로다. 원 체도 못난 구석이 많은데 이놈 딱쟁이까지 들어앉으니 얼굴 사정이 더 서글퍼졌다.


다음날이면 철야가 거의 일주일이 돼가던 날이었다. 거기에 딱쟁이까지 있으니 기운마저 황폐했다. 힘없이 터덜터덜거리는데 부장님이 “야 얼굴 왜 그래”라신다. 차마 당신 때문이라고는 못하고 그냥 모른다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재차 얼굴 안부를 물어보는 게, 그제야 이 딱쟁이 때문에 얼굴 딱하기가 말이 아닌지 알 수 있었다.


한창 외모에 관심 많은 서른 중반. 오춘기 예민한 직장인의 감수성을 건드리기 있기? 없기? 작아지는 외모 자신감에 벗은 마스크를 다시 장착하려는데, 옆자리에서 제 혼자 먹던 카누 봉지를 던져준다. 그리고 뒤에서는 따로 챙겨둔 과자도 주네? 이사님은 언제 보셨는지 ‘요즘 힘들죠’라는 카톡과 함께 커피 쿠폰을. 어제까지도 우락부락하던 분위기가 어째선지 나한테 만큼은 예외 적용되고 있다. 아 그랬구나... 이제 알겠다...


떡진 머리에 거친 피부. 깎지 않은 수염. 옷은 일부러 후줄근하게 입고 퀭한 눈으로 전방 주시. 이것은 윗선을 압박하고 주변에는 신경 끄라는 무언의 퍼포먼스. 길어지는 야근에는 시위하듯 온몸으로 피로를 어필한다. 하지만 이것도 버릇이 돼서 영 효력이 다 되고 있었다. 헌데 돌연 나의 딱쟁이가 그 기류를 바꾸었으니, 사람들은 내 딱쟁이만 확인하면 실제 이상으로 나를 딱하게 여기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없는 형편에 적선까지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 같이 힘든데 나만 유난인 것 같아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과자도 받아먹고, 커피도 얻어 마시고, 여기저기 적잖은 위로를 듣노라니 금세 그 재미에 빠지는 게 아닌가. 나중에는 요새 프로젝트가 어쩌니 저쩌니 허세도 부리고, 휴가를 빨리 쓰네 마네 미리 떡밥도 던져놓고. 누가 보면 일은 혼자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제 그렇게 빨리 딱쟁이가 들어앉더니만, 이것이 무섭게 아물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는 아주 훈장처럼 지니던 딱쟁이인데 다 낫는다고 생각하니 이건 상처 낫는 게 아니라 귀중품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뺏기는 성싶어 섭섭하고 원통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노고에 대한 대가처럼 으쓱했는데 금방 없어질 거라니 허망한 것이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다시 덧나기만 바라는 와중에도 눈에 띄게 새살만 금방 돋고 있었다.


결국에는 딱쟁이를 띄고 보통 못난이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평범해졌고 우리로서 다시 고군분투 중이다. 사실 딱쟁이가 오래갔어도 사람들이 계속 관심 있을 일도 아니었다. 그게 뭐라고 살짝 으쓱했던 건 관심이 고팠다기보단 노고에 대한 인정이 아쉬워서였던 것 같다. 좌우간 딱쟁이로 커피값은 벌었으니 손해는 아니니까. 가끔 새살 돋은 그 자리를 만져가며 사사롭던 그 날의 권세를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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