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지기 전 대대적인 방 정리. 놔둘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던 중 애매하게 따로 묶이던 것들이 있었다. 리바이스 스웨터, 맨투맨 티셔츠, 파나소닉 면도기, 로션과 선크림, 고급 스케치북, 에코백, 당시 꽤 비쌌던 아트 펜 두 자루. 이것들은 모두 선물 받은 것으로 고마운 마음에 쓰지 못하고 바라만 보던 것들이다. 그러다 특별한 날이 오면 쓰려했던 것들이다. 그렇게 아끼고 아끼다 해묵어 버린 것들. 이 모두는 차등 없이 나의 기쁨이고 자랑이었다.
하지만 애정 하던 물건들은 휘발된 알콤 솜처럼 변했다. 촉촉했던 추억은 증발되어 건조한 기억으로 남았다. 이것들을 다시 모아둔 건 아직 남은 미련일까. 선물들의 계기였던 인연들은 모두 이별로 마무리되었다. 각별한 마음에 훈장처럼 진열했던 물건들. 돌이켜보는 지금에선 그 모두가 순간이었다. 신기하게도 감정은 빠르게 정리되었고, 그 의미가 퇴색되기 무섭게 곧바로 제 용도로 쓰이거나 버려졌다.
청소는 끝났고 방은 말끔해졌다. 짧은 번민 끝에 추억의 물건들은 쪼개져 일부는 버려지고 일부는 보관되었다. 시간에 비례해 이것들의 부피도 줄어들고 있다. 털어낸 먼지와 함께 나풀대는 추억의 향취가 방안을 서성인다. 마지막 술잔처럼 코끝을 간지럽힌다. 얼마 없는 술을 잔에 모두 털어냈다. 흐릿한 기억의 숙취에 또 한 번 늙어버렸다.
오늘 다시 훔쳐본 노병의 슬라이드. 승자 없는 전쟁에서 여태 살아남아 패잔병이 되었다. 남은 건 빛바랜 전리품뿐. 그 위를 온전하지 못한 추억들이 먼지처럼 앉아있다. 옅어지는 기억에 아쉬움이 없다는 건 의연함일까. 결국은 의외의 정리벽으로 모두 버려지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