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4일부터 24일까지 한국에 다녀옴
원래 모든 시간이 그렇듯 한국에 다녀온 20여 일이 꿈과 같다.
가기 전엔 그리웠던 것 같고, 가서는 혼란스러웠고, 돌아오고 나니 꿈을 꾼 듯하다.
한국은 여전하면서도 나를 이방인임을 실감케 했고, 형제들과 친구들은 여전히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서로 나이 먹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제 너무 노쇠하신 부모님의 흔들리는 발걸음은 나를 홀로 뒤돌아 눈물짓게 했다.
지금 제일 강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나를 기억하고 안부를 물어준 사람들의 마음과 지리산 물안개 피어오르던 풍경이다.
독일 이민 후 초창기엔 한국에 가면 못 먹은 한식에 대한 갈증을 풀러 가는 목적이 강했었는데, 이번엔 그런 욕구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거기에 점점 높이 올라가는 고층빌딩과 더 화려해지고 풍요로워진 물질문명 속에서 나는 때 아니게 엉뚱한 쓸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이제 그런 물질문명들이 좀 부질없다고 느끼는 나이에 이른 것인지. 분명한 것은 내가 더욱 촌스러워졌다는 것이다. 화장도 염색도 하지 않는 나는 나의 그런 외모에 스스로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뻔뻔해진 촌부일 뿐이다. 나는 이제 외모나 물건에 애착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완전한 무소유는 아니고 적당한 선(내가 편한 선)에서 타협하고 있다.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내 맘 편한 것에 제일 중점을 두려 한다. 타인의 시선은 이제 그다지 중요치 않다. 누가 이런 하찮은 촌부를 신경 쓰기나 한다고 나 스스로 그 시선의 그물 속으로 들어가겠는가?
한국은 물질문명의 최고를 향해 달리고 있었고 나는 거기에 어울리지 않음을 알게 된 여행이었다.
그러나 거기엔 나의 사람들이 있었다. 5년 동안 못다 준 사랑을 한꺼번에 다 베풀어 주려는 가족들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었고, 그에 비해 나의 사랑 표현은 서툴기만 해서 내내 미안했었다. 결국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가 불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애달펐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 번다한 일상 속에서도 모두 편안하고 행복하길 빌면서, 나 홀로 편안한 일상을 누리고 있음을 좀 미안해했다. 염치없다는 말이 솔직한 표현이다. 제일 그런 것이 부모님 때문임을 이민자들은 대강 짐작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임에도 자식의 맘이 다 그렇지 않겠는가?
한국 일정의 대부분은 가족들, 친구들과의 만나고 부대끼는 시간들이었지만, 그 와중에 지리산에 잠시 들렀다. 잠깐의 쉼을 위한 시간이었고 결국 제일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되었다. 통나무집 펜션은 우리 가족만 손님으로 있어서 편안했다. 노고단 등반은 비록 구름 속에 아무 전망도 보지 못했으나, 성혁이의 버팅김을 이기고 다녀온 재미와 보람이 있었다. 그날 밤, 밤새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는 호사를 누렸으며 아침에는 지리산 자락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보며 추억에 잠기는 낭만도 느꼈다.
물론 도심지 여행도 했다. 지난번에 못 갔던 서울타워도 갔었고 인사동 골목 주점에서 동동주도 마셨다. 종로거리도 좀 걸었다. 그럼에도 돌아온 지금 난 지리산의 물안개가 또 보고 싶을 뿐이니, 나는 또 자연 속에서 위로를 얻는 촌사람이구나 싶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하루빨리 또 보자 하며 이별인사를 나누었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을.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며 다짐하며 그렇게 되길 희망했다. 내가 또 언제 한국에 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긴 하지만, 연로하신 부모님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가야 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기에 맘이 분주해진다.
긴 여행 끝에 우린 늘 깨닫는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행이었음을.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맘에 제일 설렜지 싶다.
집에 오니 정말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