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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이 Dec 22. 2020

선함의 불편함



국민학생 시절, ‘선아’라는 친구가 있었다. 착할 선(善), 아이 아(兒)를 써서 착한 아이로 자라라는 뜻의 이름. 선아는 정말 착했다. 내가 도시락을 깜빡 잊고 가져오지 않았을 때는 밥도 나눠주고, 혼자 화장실 가기 무서워 함께 가자고 하면 흔쾌히 같이 가주었다. 그런 선아가 친구로서 정말 고맙고, 좋았다. 그 시절 숱하게 읽었던 책 속에서도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권선징악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차카게 살자'가 인생 최고의 가치인 줄 알았다.


대학생이 됐다. “소개팅할 남자애 어때?”라는 물음에 “잘생긴 건 아닌데 착해~” 이러면 백발백중 정말 무매력의 사람이 나왔다. 요새 말로 '노잼'이었다. 유머감각이 결여된 건지, 서로 유머코드가 맞지 않던 건지... 대화 속에서 짜릿한 무언가가 오가며 '와 이 사람 맘에 든다'라기 보다 정말 그냥 무미건조했다. 대화를 하면서도 그냥 웃기만 하고 딱히 리드하는 모습도 없었다. 대화도 잘 통하지 않아서 그냥 한 두번 만나고 말았다.


나이가 들어가며 '착하다는 것'이 진짜 착함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딱히 특징이 없을 때 그냥 하는 말인 듯 했다. 늘 좋은 의미는 아니란 걸 깨달았다. 요즘에도 매일 살면서 착한 것이 늘 좋은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1. 님아, 그 문을 잡지 마오

음식점, 카페, 지하철 등 우리는 하루에도 수 많은 문을 통과한다. 그 미닫이 문을 통과하며 뒷사람을 배려해 문을 잠시 잡아주는 것은 현대사회인의 미덕이 됐다.


장소는 회사 안. 바깥으로 가려고 일어난 직장인 A와 직장인 B가 있다. A는 미닫이 문을 통과한 후 뒤에 있는 B를 배려해 문을 잡고 서 있는다. 나름의 친절이자 동료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B는 힘들다. 오늘 아침 넘어져 다리를 삐끗해, 빨리 걸을 수가 없기 때문. B는 A가 오래 문을 잡고 서 있지 않도록 빠른 걸음으로 출입문까지 갔지만, 다리가 너무 아팠다. 오히려 문을 잡고 자신을 기다리는 A의 행동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A의 배려가 고마워 빠른 걸음으로 문으로 향했다. 가벼운 목례로 고마움의 표시도 잊지 않았다.

A는 뿌듯했다. '아 나는 정말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야' 라고 잠깐 생각했다.

B는 다리가 너무 아팠다. '아 그냥 천천히 걸어갈걸' 그날 병원에 가 보니 발목의 상태가 좀 더 악화됐다.



#2. 두 대의 마을버스

마을버스 정류장은 일반 버스 정류장보다 협소하다. 한 대의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하면 정류장 공간은 이미 꽉 차버린다. 그런데 두 대의 버스가 연달아 정차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승객인 나는 조금 난처해진다. 앞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정류장에 정확히 정차한 버스를 안전히 탈 수 있다. 그러나 뒷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정류장 공간 안에서 기다리는 부류, 하나는 승차하려고 정류장 밖 버스로 뛰어가는 부류.


한국 사람들은 8282 성향이 강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8282 승차하려고 뒷 버스를 향해 뛰어간다. 이렇게 한 승객이 먼저 타려고 뛰어가는 순간, 뒷 버스의 기사님은 그 승객을 태우기 위해 문을 열고 나머지 승객들도 정류장 공간이 아닌 도로 공간으로 뛰어야 한다. 이 때 앞 버스는 출발해 버리고, 뒷 버스는 정류장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럼 뒷 버스를 타려던 승객들은 다시 버스를 따라 뛰어간다.


문을 열어 준 뒷 버스 기사님은 빨리 타려는 승객을 위한 선한 마음으로 열어주었을 거고, 뛰어간 승객도 일단 타야겠다는 생각이 우선이지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을 거다. 그런데 정류장에서 버스를 안전히 타고 싶은 사람들은, 왜 정류장이 아닌 도로까지 뛰어가서 버스를 타야 할까. 이 상황에서 아무도 악의를 갖고 행동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불편한 상황은 생겨버렸다.


나는 선한 의도로 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사회의 속도가 빨라지고 복잡해질 수록 '선함'의 의미가 일부 변형되어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 있는 거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모든 사람의 상황이 절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함'을 악용하는 것에는 단호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약자의 상황을 이용해 자신의 주머니를 불리고, 슬픔을 활용해 다수를 선동하며, 선함을 외치면서 위선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가려낼 줄 알아야 한다. 선함이 불편함으로 다가올 때 그것을 포용하고, 선함의 탈을 쓴 위선은 가려내며, 나의 선함을 제대로 지켜야 한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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