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여행 2
"얘들아~ 미안해. 아무래도 안될 거 같아"
배에서 하선한 지 10시간이나 지났는데 신랑의 멀미기운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저녁때 숙소로 돌아와서도 어지럽다며 일찍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 사이 아쉬운 마음에 아이들과 숙소 근처 산책도 하고 마트 구경도 다녀왔지만 한숨 자고 일어난 신랑은 내일 렌트를 해서 가보기로 한 코린토스 운하를 갈 자신이 없다고 했다. 생각보다 힘들어 보였다. 여행 전 이석증을 앓았던 나도 괜찮은데 건강한 신랑이 계속 두통과 어지럼증을 호소하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고 큰 걱정은 안 하고 있었는데 하루가 지나도록 힘들어 하는걸 보니 걱정도 되고 안쓰러웠다.
"그래 무리하지 말자. 아테네에도 볼게 많으니까. 좀 더 여유 있게 다녀도 좋을 거 같아."
괜히 무리해서 렌트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천천히 일어나 여유 있게 움직이기로 했다. 이제 내일이면 귀국해야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계속 진행 중이므로 컨디션도 잘 챙겨야 한다. 여행의 말미엔 더더욱 그렇다. 긴장이 점점 풀릴 때가 되면 멀쩡하다가도 감기 몸살이 나기도 하고 배앓이를 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정신력으로 무장해 열심히 다니던 여행길도 집으로 돌아갈 때쯤 되면 더욱 피곤을 느끼게 되는 인간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아크로폴리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던 제우스 신전을 먼저 가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나와 걸어가는데 여전히 거리 곳곳엔 그래피티로 가득하다.
복잡한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제우스 신전은 그리스 신화의 12 신들 중에서도 '왕 중의 왕' 제우스를 위해 만든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신전이다. 하지만 로마제국 시대를 거쳐 완성된 이 신전은 전쟁과 지진등으로 파괴되고 훼손되면서 현재는 15개의 기둥만 남아 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에도 여전히 보존을 위한 보수공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중 108미터의 긴 기둥 하나가 고스란히 넘어져 있다. 이 기둥은 1852년 태풍으로 무너진 것을 그대로 보존한 것이라고 했다. 이 기둥이 넘어졌을 때 얼마나 큰 소리가 났을까? 호기심 많은 려환이가 손과 발로 주변을 만지작 거린다. 신발에 걸리는 돌바닥을 비비니 커다란 돌멩이가 나온다.
"형아. 이것도 이 기둥에서 부서져 나온 걸까?"
아빠가 깜짝 놀라며 만지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주의를 주셨다. '이거 하나쯤이야~' 하고 생각했던 려환이가 흠짓 놀랐다. 아빠 선생님은 어떠한 역사의 일부분도 우리가 물리적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어쩌면 아니 진짜 이곳의 모든 것들이 다 유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방대하고 오래된 것들이라 고고학자들이 평생을 바쳐도 밝혀내지 못하고 대를 이어가며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서기 500년대 초반에 일어났던 지진에 의해 그 거대했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제우스상은 아직도 이 땅 속 안에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믿기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방문해 돌기둥 몇 개뿐이라고 볼 게 없다고 한다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한걸음 한걸음이 조심스럽고 역사의 일부를 탐험하고 있는 듯 즐거웠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은 도리스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제우스 신전의 기둥은 어떤 양식이 사용되었을까요?"
"정답: 코린트 양식"
"딩동댕~"
"자~~ 여러분. 기억하세요. 서양사에서 시대와 특징을 말해주는 기둥의 양식은 꼭 알아두어야 합니다."
아빠 선생님의 신나는 고고학 공부는 은근히 재미있는 여행 가이드다.
제우스신전의 북서쪽 방향을 보면 '하드리아누스 문'이 있고 그 문 넘어 위로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서기 131년, 제우스 신전을 완공시켜 위상을 높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신전의 북서쪽에 하드리아누스 문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는 방향에는 "이것은 테세우스의 도시. 아테네"라고 새겨져 있고 반대편엔 "ΑΙΔ' ΕΙΣ' ΑΔΡΙΑΝΟΥ ΚΟΥΧΙ ΘΗΣΕΩΣ ΠΟΛΙΣ (이것은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고 테세우스의 도시가 아니다)."라고 새겨져 있다. 로마인인 하드리아누스 자신이 그리스인의 영웅 테세우스를 뛰어넘었다는 자신감 넘치는 메시지인데 해석이 재미있다.
아치문을 지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Μουσείο Ακρόπολης)으로 향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후문으로 내려오면 바로 보이는 이 박물관은 건물이 위치한 자리부터 거대한 유적지 그 자체였다. 상당히 대비되는 현대적인 건축물에 고대의 유물을 전시한 곳이라니 상징적이고 조화로운 곳이었다. '아테네에선 붓질 스무 번이면 유물 한 점이 나온다'라는 말이 있듯이 건물 바닥을 통유리로 마감해 놓았는데 옛날 도시의 유적터가 저 위 아크로폴리스부토 그대로 이어져 있는 느낌 이었다. 헤라클레스, 트리톤 등 그리스신화의 영웅들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흉상과 아크로폴리스에서 출토된 도자기와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에렉테이온의 여신 기둥인 카리아티드 진품도 이 박물관 2층에 전시되어 있다.
지하 전시실로 이어지는 주변은 올리브 나무들로 큰 정원을 이루고 있다. 블랙 올리브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탐스런 나무에서 떨어진 올리브 하나를 주웠다. 그리고는 궁금해하는 려환이의 호기심을 위해 슥슥 닦아서 입으로 깨물어 봤다.
"아유 떫어!. 근데, 올리브 맛이 난다. 음~ 맛있는데?"
“엄마! 진짜 올리브니까 올리브 맛이 나지. ㅎㅎ”
몇 해 전 올리브 나무를 키우다가 냉해를 입어 나무를 통째로 베어 버렸는데 여기 올리브 나무들을 보니 너무나 탐스러워 부러웠다. 고대 지중해의 상징 올리브는 그리스 신화에서도 존경받는 나무였고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스인들의 주요 지방 공급원이기도 했던 올리브 가로수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박물관에서 근대 올림픽 경기장까지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아테네에서의 마지막 날이기에 우리는 천천히 걷기로 했다. 아빠의 어지럼증도 다행히 점점 호전되어 가고 있었다.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은 1896년에 지금의 모습과 비슷한 근대 올림픽이 처음 열렸던 그 경기장이다. 10유로의 입장권이 좀 비싼 느낌이었지만 직접 둘러보니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모든 좌석과 경기장이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 세계 유일하다고 한다.
왕과 왕비의 자리와 VIP들이 앉았다는 등받이가 있는 대리석 좌석이 구별되어 있어 당시의 계급차이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과 가장 의미 있게 본 건 오륜기의 컬러였다.
"오륜기가 하얀색이네?"
"처음엔 색이 없었나 봐. 모두가 평등하다는 뜻일까?"
"그럴 수 있겠다. 현재의 오륜기는 각 대륙을 나타내는 빨강, 노랑, 파랑, 초록, 검은색을 나타낸다고 하잖아."
하지만 여행 후 찾아본 오륜기의 역사와 의미는 우리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대 올림픽이 중단된 지 1500년이 지난 1896년 쿠베르탱에 의해 다시 근대 올림픽을 시작하게 되었고 오륜기는 1920년 벨기에 안트베르펜 올림픽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오륜기의 모양이 다섯 개의 대륙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섯 가지 색상은 대륙이 아닌 여러 나라의 국기에 많이 사용되는 컬러가 대표적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이런 아이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었다게 부끄러웠다.
그리고 역사의 사실을 우리의 생각대로 해석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깨달음을 알았다.
고대 검투사들이 대기했다는 터널로 들어가면 작은 전시관이 나온다. 역대 올림픽 포스터와 성화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추억의 88 올림픽 호돌이가 그려진 포스터와 성화봉, 그리고 2018 평창 올림픽 때 사용된 성화봉도 만날 수 있었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날이 2024 아테네 국제 마라톤 대회를 하루 앞둔 날이라 행사준비로 검은색 트랙을 돌지 못해 아쉬웠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아테네에서의 마지막 역사 투어였다.
어릴 적 누구나 들어봤던 그리스 로마 신화. 그 중심에 있는 도시 아테네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이름이지만 실제로 방문하기엔 먼 나라로 항상 로망의 도시였다. 특히 크루즈의 여행 루트가 아니었다면 더욱 방문하기 어려웠을 거 같다.
아이들과 함께 많은 유적지들을 탐방하고 그리스 신화와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며 올리브 나무가 늘어선 길을 걸어보니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여행은 평소보다 많이 걷게 하고 그 걸음의 속도는 평소보다 느리듯 여유 있다. 그래서 더 많은 풍경을 바라보게 하고 평생 남을 소중한 추억을 선사해 준다.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리의 좁은 시야를 넓혀주기도 하고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가족끼리 여행하며 끊임없이 다양한 소재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건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