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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Apr 21. 2022

심심한 것이 두려웠던 것은 나였다.

툭하면 자연이 닿는 곳이 너무 좋다

어쩌자고 아이보다 먼저 일어나지 못했을까.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해가 떠버렸다.

오늘은 무엇을 먹여야 할까.

오늘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까.

아이가 깨어있는 시간이 두렵다.


나는 매 순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늘 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엄마표 놀이, 집콕 놀이를 검색하려 핸드폰을 붙들고 지냈다.

어김없이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자란다.

너무나 쉽게 소중한 아이를 일찍이 뒤처진 아이로 자라게 하는 것은 아닐까.

검색을 하는 와중에도 아이는 내 발목을 붙잡고 울고 있다.

검색을 빌미로 사실은 보챔을 피하고 싶었던 마음이 들킨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죄책감이 든다.



아이의 가느다란 울음도 나에게는 순식간에 삶을 덮쳐버리는 폭풍우 같았다.

하루 종일 밤을 기다렸다.

밤이 오면 미안한 마음을 빼곡히 채워 아이의 곁에 두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이가 자는 밤에도 달빛이 아파 그렇게 울었다.


코로나가 아닌 세상에 태어났으면, 육아가 좀 쉬웠을까?

이것저것 할 것이 많은 수도권에 살았으면, 육아가 좀 재미있었을까?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아이와 살아야 할까.


흐르는 눈물을 삼키기 힘든 날이면, 아이를 카시트에 태워 잘 때까지 드라이브를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라이브를 하다 막다른 길까지 오게 되었다.

그날은 어쩐지 아이도 도저히 잠을 이루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작정 내렸다. 어떤 건물의 야외주차장이었다.

그곳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아주 작은 이름 없는 공원이 있었다.

몇 개의 웅장한 나무를 해 집어, 빛이 있는 곳으로 따라 들어갔다.

바다가 훤히 보였다.

사람 손을 타지 않아서, 나무 하나하나가 투박하지만 자연스럽고 웅장했다.

사람이 없어, 아이는 살며시 마스크를 벗어보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스크를 벗고 자연의 냄새를 맡아본 아이의 탄성을 잊을 수 없다.

나도 아이를 따라 참으로 오랜만에 마스크를 슬며시 벗어보았다.


무슨 냄새인지 설명할 수 없는 냄새들이 여기저기서 피어났다.

촉촉한 흙냄새.

그 흙냄새가 조금씩 말라가며 나무와 풀잎에게 붙어 다시 태어난 싱그러운 초록 향.

아이는 마치 그 향기가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듯, 보조개 깊이 생생하게 웃었다.


그날 해가 지도록 흙탕물에서 이리저리 첨벙첨벙 뛰었다.

자유로웠다.

돌아오는 길에 물에 젖은 흙냄새가 아이의 땀방울과 석여 진동을 했다.

그 매캐한 냄새가 정말 향긋했다.


그날 이후 나는 툭하면 아이와 이름 없는 곳을 찾으러 다녔다.

그중에 제일은 바다다.

날 대신하여 끊임없이 아이를 쫓는 파도가 있고,

한 움큼 집어 아무 곳에 던져버려도 제자리에 정리할 필요가 없는 모래가 있다.

소라개, 아기 바지락, 아기 홍합, 밀려들어온 미역줄기, 엄마를 놓친 물고기가 휩쓸려 들어오기도 했다.

철마다 미약한 생명들이 움트는 곳에서 아이는 포악한 사냥꾼이 되기도 하고 너그러운 보호자가 되기도 했다.


이 넓은 곳이 마치 자신의 방인 것처럼 자연에 닿아 마음껏 상상력을 펼쳤다.

나도 정제되지 않고, 지켜야 할 규칙이 단순한 자연에 아이를 내버려 뒀다.

그렇게 둘이서 속삭이는 자연이 너무나 향긋했다.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노는 아이를 바라보고서야 깨달았다.

자연에서 아이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가고, 스스로 놀잇감을 찾으며 자연에게서 자존감을 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낯간지럽게 자연의 진리를 느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자연을 의미한다면, 그래서 그 자연이 아름답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환경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처럼 사는 우리의 모습도 아름다우리라.


심심한 것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를 심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아름다운 엄마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나와 아이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심심하도록 내버려 둔다.


심심한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아이가 깨어있는 시간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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