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같았던 3일의 기록
10시간이 넘는 비행과 고난으로 내 몰골은 매우 초췌한 상태였다. 좀 씻어야겠다 싶어 배낭가방을 열다가, 세면도구가 모두 캐리어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캐리어를 언제 되찾을지 모르니 당장 쓸 생필품들이 필요했고, 근처 마켓에 가 간단한 세면도구와 화장품 등을 구매했다. 후에 보상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몰랐기 때문에 영수증도 잊지 않고 챙겼다.
공원 의자에 앉아 마켓에서 구매한 초코머핀을 먹으며, 캐리어를 찾지 못할 ‘if’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4일간 머물다 라스베가스로 넘어가는 일정이었기에, 만약 그전까지 캐리어를 찾지 못한다면? 라스베가스로 가는 비행기, 호텔, 그랜드캐년 투어 등등 모든 게 예약된 상태인데 다 바꿔야 하나? 캐리어를 영영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물건을 사야 하는 거지? 상상력이 풍부한 mbti 답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갔다. 머핀을 우물우물 먹으며 내 상황이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행 마지막이면 몰라도 여행 시작에, 왜 도대체 나에게 이런 일이ㅠㅠ?!
자다 깸을 반복하다 일어난 샌프란시스코의 아침. 호스텔 침대에서 뒤척거리다 문득 항공사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을 통해 항공사의 미국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해외에서 유독(?) 활발한 나의 용감함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지!’라는 마음가짐으로 내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으며, 심각성을 강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외국인과 영어로 전화를 해본 경험이 없어 잔뜩 긴장했지만 번호를 눌렀고, 곧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상황을 설명한 후 ‘나 3일 뒤에 샌프란시스코 떠야 하니까 반드시 그전까지 짐 찾아주세요’라고 강조했다.
갈아입을 옷도 없는 데다 나와 맞지 않는 세면도구, 화장품을 사용하느라 매우 퀭~한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호스텔 밖을 나섰다. 샌프란시스코를 상징하는 트램을 타고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했고 예쁜 카페를 방문해 커피도 마셨다.
가고 싶었던 곳을 구경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불안함이 있었다. 캐리어 분실 신고를 한 지 꼬박 하루가 지났고, 아침에 전화한 후 반나절이 지났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던 것이다. 괜히 속이 답답해져 항공사에 다시 한번 연락했지만 여전히 캐리어를 찾는 중이며, 발견하는 즉시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캐리어를 분실한 지 이틀이 지났다. 여전히 초췌한 모습이지만 바다사자들을 구경하기 위해 '피어 39'를 방문했다. 주변을 둘러보다 점심으로 클램 차우더를 먹고 있던 중, 익숙한 번호로 전화가 왔다.
네 캐리어가
오늘 베이징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거야!
호텔로 배송해줄까?
그렇다! 바로 항공사였던 것이다!! 내 캐리어는 다른 나라로 간 것도 아니고, 내가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동안 혼자 덩그라니 베이징에 남겨졌던 것이다. ‘땡큐땡큐땡큐!!!’ 너무 기뻐서 땡큐만 끊임없이 외쳤고, 내 눈으로 확인하고 들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아 공항에 가서 직접 캐리어를 찾겠다고 말했다.
세상에! 혹시나 영영 잃어버릴까 얼마나 걱정했던지ㅠㅠ 캐리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안심이 되고 기뻐 가슴이 두근거렸다.
캐리어 분실 3일 차. 드디어 내 캐리어와 다시 만나는 날이다. 이 날은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캐리어를 실은 비행기가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골든 게이트 브리지로 향했다. 바닷바람이 조금 차가웠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다리 위에서 바라본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풍경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다시 방문한 샌프란시스코 공항. 내 캐리어가 있을 거라고 알려준 수화물 센터로 향했다. 가는 내내 ‘그런 가방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떡하지 걱정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센터에 다가갔다.
그런데, 저 멀리 내 눈을 사로잡는 다홍색 물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캐리어는 다른 캐리어들과 함께 끈으로 묶여있었다. 울컥하기도 하고 감격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직원에게 가서 ‘저거 내 캐리어예요!!!!’라고 들떠서 얘기했다. 그랬더니 직원은 캐리어에 붙어있는 종이를 보고 '주소가 ooo 호텔이니?'라고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싶었는데, 직원이 말하길 ooo 호텔로 주소가 되어있어 거기로 배달 예정이었다고 한다. 즉, 내가 조금만 더 늦게 공항에 왔으면 캐리어는 또다시 나와 생이별을 했을지도 몰랐던 것이다!
순간 끝까지 일처리를 이렇게 하나 싶어 어이도 없고 화가 났지만, 캐리어를 되찾은 기쁨이 우선이었기에 그냥 직원에게 내가 들고 간다고 말했다. 그렇게 드.디.어 나는 나의 다홍빛 캐리어와 함께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3년 같았던 3일은 캐리어와 함께 숙소로 돌아오며 끝을 맺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마지막 날은 내가 캐리어에 넣어온 옷을 입고, 스타워즈를 제작한 루카스필름을 방문하며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나는 캐리어와 함께 다음 행선지인 라스베가스로 이동했다.
이 사건을 겪으며 크게 깨달은 두 가지 교훈이 있다. 첫째는 무슨 일이든 나에게 일어날 수 있으며 그걸 결코 가볍게 여겨선 안된다는 것이다. 비행기 티켓을 끊고 블로그 후기들을 찾아보며 ‘설마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또 한 가지는 싼 가격에 속아 무엇이든 덜컥 구매하지 말자는 것이다.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항공사와 분실 보상금 문제를 해결하며, 앞으로는 무조건 인터넷에서 정보를 먼저 확인한 후 결정을 내리기로 다짐, 또 다짐했다.
그런데, 미국 서부 여행에선 더 다이나믹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