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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May 09. 2017

음악에 비추어 나를 바라보다

서경식 선생의 [나의 서양음악 순례]

이 책은 서양음악에 관한 주제로 2010년 4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문화웹진 ‘나비’에 연재한 에세이를 묶은 책이다. 저자는 재일교포인 서경식 선생인데 이 책을 쓸 당시 그는 예순 살의 중년이었고 앞서 [나의 서양미술 순례]라는 책을 출판할 때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30대의 절망한 청년’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먼저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게 되면서 저자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그 책은 서양미술에 대해 풀어내는 박식하고도 유려한 문장에 매료되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이 책, [나의 서양음악 순례]인데 그 이유는 이 책이 훨씬 더 여유 있어 보이고 잔잔하면서도 유쾌하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이 쓴 책이라고 해도 절망한 30대의 청년이었을 때와 예순 살이 넘어 쓰는 문장은 어쩐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새롭다. 또한 이 책에는 저자의 아내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름은 없이 ‘F’라고만 소개된다. 그 F와의 대화를 읽는 것이 이 책의 또 하나의 즐거움으로 F는 진지한 저자와는 달리 자유분방하고 소녀 같아서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책의 각 장은 개별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에 와서 보러 갔던 연주회, 여행을 하며 만났던 여인과 얽힌 CD에 대한 기억, 어릴 적 접했던 음악에 대한 이야기, F와의 만났던 기억 등을 초반에 여러 장에서 펼쳐낸다. 그리고 이어서 몇 개의 장에 걸쳐서 잘츠부르크 음악제와 연관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치 내가 그 음악제에 와 있는 듯한 상세한 설명과 연주자의 이름, 연주된 곡명과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러고 나서 한국의 현대음악가인 윤이상 선생과 얽힌 여러 이야기를 몇 개의 장에 풀어내고 빈의 겨울 시리즈, 말러에 대한 이야기, 음악이 폭력이 되어 휘둘러진 역사의 장면들, 슈베르트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차례로 몇 개의 장에 걸쳐 펼쳐진다. 연재 글을 모은 것이라 그런지 어쩌면 두서없이 보이지만 각각의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마치 중편소설을 읽듯이 어떤 흐름이 읽히는 구성이다.


저자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저자인 서경식 선생은 재일동포로서 일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서경식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저자에 의해 일본어로 쓰여서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라는 특이한 배경이 있다. 그의 부모는 일본의 경제 부흥기에 열심히 일해서 가난을 면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재일동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의 형들은 달랐다. 그가 스무 살 때, 그의 형들은 모국인 한국에서 유학을 했는데 유신정권 시절 정치범으로 구속을 당했고 그 이후 서경식 선생은 형들의 구원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고향에서 아버지의 공장일을 도우며 글쟁이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형들의 구원 운동을 하며 고향에 있는 동안 아마추어 연주회 단원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면서 음악을 더욱 가깝게 접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아내인 F도 만나게 된다. 이후 어머니가 형들의 옥바라지를 하며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고생을 하다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얼마 후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된다. 그 이후 그는 국제사면위원회 등 인권단체에 찾아가 형들을 비롯한 옥중 정치범의 위기적 상황에 대해 호소할 목적으로 유럽 여행을 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빠리의 쌀 쁠레옐 극장의 콘서트를 보게 되는데 그것이 그가 본 첫 콘서트였다. 그곳에서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가 처음 지휘봉을 내리긋는 순간!..... 등줄이 오싹 서늘해지는 감각, 살갗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는 듯한 감각이 나를 덮쳤다. 음악을 듣고 그런 감각에 휩싸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그때가 처음이었다. 음향이 귀에서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직접 피부를 통해 척추를 울리며 들어왔다. 무대 위에서는 무지갯빛 불꽃이 잇달아 터지고 있는 것 같았다.
p. 85


이 책의 제목은 [나의 서양음악 순례]인데 전체적으로 보자면 ‘서양음악 순례’ 보다는 ‘나의’에 더 방점이 찍혀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은 이 음악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보고 그 바라본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연이어 등장하는 수많은 낯선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의 이름과 곡명이 그리 거슬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서양음악을 소개하는 책이라기보다는 서경식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위대한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에 대해 잘 알고 이 책을 읽는다면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열릴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다만 나처럼 서양음악에 대해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이 책을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요 내용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대한 서술일 것이다. 그는 2000년 이후 11년간 매년 아내 F와 함께 이 음악제를 찾고 있다. 매년 이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음악제를 찾다 보니 음악제의 흐름과 연주자들의 실려의 향상, 무명의 연주자가 유명해지기도 하고 기대했던 연주자에게 실망하기도 하는 등 수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어 그것들을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페이지를 쉽게 채운다. 또한 음악제를 계기로 친구도 만들게 되고 스치는 인연과의 에피소드 등 다양한 이야기가 이 음악제와 얽혀서 흘러나온다. 저자의 이런 생활이 참 부러웠다. 하지만 십 년 넘게 이런 음악제에 참석하는 것은 왠지 나로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나도 이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잘 연결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 현대음악가 윤이상 선생과의 인연이나 말러에 대한 이야기 등도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 읽을 때는 인상 깊게 다가왔다. 단순히 한 사람과의 인연, 한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때로는 아픔에 함께 공감하며 이야기를 풀어 가는데 나는 특히 이 부분, 말러의 말을 인용해 놓은 이 부분에서 저자가 말러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를 엿볼 수 있었다.


내게는 삼중의 의미에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인 사이에서는 보헤미안이어서, 독일인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인이어서, 지상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이어서.
p.257


나는 말러 교향곡 연주회를 딱 한번 가 본 적이 있는데, 그 연주회에서 기억나는 것은 내가 거의 첫 줄에 앉아서 연주 내내 졸았다는 것과 눈을 떴을 때 어느 연주자와 눈이 마주쳐 굉장히 민망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밤을 새워 석사논문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말러 교향곡을 들으러 가는 선택 자체에 문제가 있었겠지만, 그만큼 나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기껏해야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아주 유명한 곡들 정도에나 익숙한 귀로는 말러 교향곡은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그나마도 지금은 거의 연주회에 갈 기회가 없으니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벌써 몇 번째 읽고 있지만 여전히 마냥 쉽지만은 않은 책이다. 읽을 때마다 ‘이런 내용이 있었나?’ 싶은 그런 책이고 아마 열 번을 읽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자들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번 읽을 때보다 두 번째 읽을 때, 저자가 음악에 비추어 자기를 바라보는 방식이 익숙하게 느껴지고 더 깊이 공감하게 되며 나아가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연습까지 하게 된다. 나는 주로 자연이나 내 일상의 경험들에 비추어 나를 바라보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런 연습을 하는데 좋은 본이 되는 책인 것은 틀림없다. 단순한 서양음악 소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상과 슬픔과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고 나의 생각과 고민에까지 닿게 해 주는, 두고두고 한 번씩 계속 꺼내어 볼 만한 좋은 책이다.        


오케스트라 연주가 모두 마치고 박수를 치기 전 마음속의 여음을 음미하듯 책의 인상적인 구절을 몇 개 적어본다.


음악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한없는 청순과 고귀함, 그리고 바닥 모를 질투와 욕망을 동시에 지닌 존재, 이쪽의 이해를 거부하면서 끌어당기고는 다시 뿌리치고 농락해 마지않는 존재, "어디가 그렇게 좋다는 거지?" 하고 누가 물어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존재, 한마디로 불가해한 여성과 같은 존재, 그것이 음악이다. 음악에 깊이 빠지는 것은 여자한테 빠지는 것과 같아서 평온하게 살고 싶은 보통 사람(즉 나와 같은 사람)에겐 위험한 일이다.
p.20 <음악은 위험하다> 중


F처럼 자신의 감각을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늘 내 감각에 자신이 없다. 좋은 음악, 좋은 연주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과연 나는 그걸 알 수 있을까...? 언제나 그런 답 없는 자문에 사로잡힌다. 숙소로 돌아오는 발걸음도 무겁고, '고역'이라는 말이 마음속을 스쳐간다.
p.111 <전통에 뿌리내린 피아니스트-2010 잘츠부르크 음악제 2> 중


나는 피리의 음색을 몰랐기 때문에 홀리거가 연주한 오보에 음에서 피리를 재발견한 게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오보에 연주에서 거슬러올라가 나 자신은 몰랐던 피리의 음색을 추측했다. 이미 거의 잃어버리고 만 내 음악적 모어의 본거지를 그렇게 해서 찾아간 것이다. 이처럼 윤선생의 음악은 내게, 나는 누구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문제를 음악이라는 측면에서 날카롭게 들이댔다. 그것은 또한 나를, 음악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커다란 문제와 맞대면하게 만들기도 했다. 나의 음악순롓길에서 중요한 이정표라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p. 162 <상처 입은 용-윤이상 1> 중


아우슈비츠에는 여성 수인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3개의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졌는데, 그 주요 임무는 계속 이송돼오는 수인들을 환영하기 위한 연주였다...(중략)... 여성 수인 오케스트라는 교수형 집행장에서도 경쾌한 행진곡을 연주했다. "죽음의 블록"이라 불린 징벌사동에서 옷도 없이 벌거벗은 채 갇혀 있는 여성 수인들 앞에서 연주한 적도 있다. 여성 수인들은 음악을 통해 치유받기는커녕 "하느님, 이런 데서 음악이라니요!"라며 울부짖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파괴였다고 조피아 치코비악은 증언한다.
p.283 <이런 데서 음악이라니-음악이라는 폭력 1> 중


여기서 끼냐르가 얘기하는 대로 음악은 인식 전달의 수단이라기보다는 언어화할 수 없는 감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서는 언어적 이성(예컨대 도덕률이나 법)을 통해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기준이 작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선의 무당이 어떤 격렬한 리듬이나 기묘한 선율에 몰입해 다른 세계와 교신하는 모습에서 음악이라는 것의 탄생 비밀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은총인 동시에 폭력이기도 하다.
p. 291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음악이라는 폭력 2> 중


이 글의 앞부분에서 나는 "음악이 위험하다"라고 썼다. 음악은 우리 신체에 직접 작용해서 우리가 지각하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깊숙이 침입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음악은 본래 선한데, 그것을 누가 악용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음악 자체에 그런 폭력석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의 '폭력성'이라는 말은 도덕적 비난 대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때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매혹적인 것도 말을 매개로 하지 않는 음악이라는 예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p. 295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음악이라는 폭력 2>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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