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우개연필 Jul 01. 2017

생각보다 훨씬 주먹구구인 세상에서 살기위해

[안목에 대하여] 필리프 코스마냐

안목에 대하여   

필리프 코스마냐 지음/ 김세은 옮김/ 아날로그 출판     


요컨대 안목은 보는 것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누구나 무언가를 보지만 다 똑같이 보지는 않는다. 나는 안목이 있는 사람이다. 아니, 안목을 갖게 되었다. 훌륭한 미술품 감정사로 거듭나기 위해 보는 법을 배우고 익혔다. 미술품에 눈먼 사람처럼 맹목적으로. 딴 데는 눈이 팔리지 않는다. 오로지 내가 봐야 할 대상에만 일편단심으로 눈길을 준다. 내가 미술품 감정사 직업을 가져서 좋은 점은 거무스레한 면 뒤에 숨겨진 밝은 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걸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미술품 감정사로서 오감을 곤두세우고 미술의 세계를 탐험한다. p.244      


필리프 코스마냐는 프랑스 사람이고, 미술사학자로서 미술품 감정사와 학예사(큐레이터)를 병행하고 있다. 전 세계 몇 안 되는 미술품 감정사로서 정체가 불분명한 그림의 원작자를 판명하고 행방이 묘연했던 걸작을 발견하며 작품의 진위여부를 판단한다. 그는 X선 분석과 같은 현대의 과학기술보다 천부적 재능과 예리한 직감, 끊임없는 현장답사로 형성된 안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직관과 지식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중요한 발견을 수차례 이루어냈다.      


이 책은 300여 쪽에 이르는 그리 얇지 않은 책이지만 나는 이 책을 순식간에, 그러니까 반나절 정도에 읽었다. 처음 제목과 작가의 직업을 보았을 때, 나는 엄청난 미술품과 그것에 매겨지는 입이 떡 벌어지는 금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내심 기대했다. 평소 그런 미술품들에 매겨지는 가격의 실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작가는 자신은 미술사학자이며 미술품에 가격을 매기는 일은 전문 감정사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미술품을 구매하거나 중간 역할을 하며 크리스티, 소더비 같은 대형 경매업체에 연계되어 가능한 한 최고로 명성 있는 화가의 작품을 구매자에게 매도하는 사람은 미술상이다. 그리고 이 미술상은 고객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위신 있는 전문가의 한마디가 필요하므로 미술품 감정사를 찾아오게 되는데 감정 소견에 따라 고가 혹은 천문학적 금액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만큼 전문가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명예가 실추될 수 있는데, 이때 실추된 명예라는 것은 단순히 창피를 당하거나 사기꾼 소리를 듣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미술품 감정은 수학 문제처럼 딱 떨어지는 공식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감성사의 안목과 축적된 지식에 따라 판가름 나는 일이기 때문에 평판이 떨어져 신뢰를 잃게 되면 앞으로의 감정과 과거의 감정까지도 의심을 받게 된다. 


미술상들은 작품의 금전적 가치에 따라 그 작품의 중요도를 결정하지만 미술품 감정사들은 작품 자체의 특별함에 주목한다. 무명의 화가들을 찾아내고 그 무명의 화가들의 작품을 찾아내는 일은 미술상들에게는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미술품 감정사, 미술사학자들에게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가 미술품 감정사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중요한 작품은 니스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브론치노가 이탈리아 피렌체의 판치아티키 가문에 그려준 이후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회화 전문 감정가들이 찾으려 했으나 실패한, 그전까지는 행방불명 상태였던 작품이었다. 그런 작품이 니스의 미술관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니스 미술관에 걸려 있었는데도 그것이 브론치노의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다른 일로 들른 미술관에서 그는 브론치노의 명작을 발견하게 되고 이 사건은 미술사에 획을 그은 위대한 사건이 되었다고 한다. 종종 많은 작품들이 전문가의 계속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지 않다가 우연한 기회에 드러나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 바로 그런 순간을 작가가 만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우연한 기회들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한 정보를 담은 바사리가 쓴 브론치노 전기에 대한 지식과 브론치노의 화법에 대한 지식, 그리고 작품을 둘러싼 배경에 대한 지식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숱하게 작품을 대해 오면서 가지게 된 그림을 보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미술품 감정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직관에서 시작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후에 전문가는 이 직관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화가의 화법이나 그려진 종이의 질, 각종 기록과 X선 판독을 통한 감정까지 다각도에서 작품을 감정한다. 그렇게 감정된 작품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발표 전 동료들과의 토론을 통해 자신이 혹시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점검을 받게 되고 그 후에야 작품에 대한 소견을 발표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미술품 감정사는 계속해서 의심의 눈으로 자신의 작업을 바라보아야 하고 혹 발표된 이후에라도 기존의 자신의 입장을 번복할만한 증거가 발견되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드러내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오히려 전문가로의 정직성과 성실함을 입증하는 길이 되며 오만하게 자기의 의견에 아무런 의심을 가지지 않고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비전문적인 일이 없다.      


내가 이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반했던 부분은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기 일에 대한 열정이다. 가끔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넘치기도 해서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방어적인 언급을 하기도 하고 자기의 업적에 대한 자랑이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은 대목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사람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 일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엄청난 열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그의 마음이 서술의 곳곳에서 묻어난다. 


어엿한 미술품 감정사가 되면 미친 듯이 온 열정을 다해 일하는 삶이 시작된다. 순수한 열정으로 작품 관찰과 고찰에 매달리던 청춘 시절을 그리워할 때도 가끔 있지만, 평생토록 위대한 모험의 묘미를 만끽하며 살 수 있다. p.122


책에서는 작가가 미술품 감정사의 길에 들어서게 되고 교육을 받은 과정, 만났던 스승들과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발견과 지금까지의 작업들에 대한 이야기를 수록하면서 미술품 감정사로서, 학예사로의 삶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전문 작가가 아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책은 서사적 흐름이나 작가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짜여있지는 않다. 미술품 감정에 관한, 그리고 안목에 관한 작가의 생각과 그에 따른 에피소드들이 두서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각 챕터마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분명하다. 나는 책을 통해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목차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목차를 구성하고 있는 제목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대략 알 수 있다.      


특별한 것을 알아보는 눈은 따로 있다
미세한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진짜 같을 수는 있어도 진짜가 될 수는 없다
직관을 따르되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
믿고 싶은 대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깊이 보라
아름다움은 준비된 사람 앞에만 드러난다
가격이 아닌 가치를 봐야 한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일에 안목이 필요하다
누구나 무언가를 보지만 다 똑같이 보지는 않는다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용도 흥미롭지만, 제목만으로도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펼쳐낼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냉정하게 평가해보자면, 제목이 내용을 훨씬 빛나게 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세상에 아직도 작가 미상의 그림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놀랐다. 나는 대부분의 그림들이 작가와 연대가 확실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고, 그래서 이러한 관계를 밝혀내기 위한 분야가 이렇게 발달할 정도라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세상일이라는 게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주먹구구식이며, 이 정도의 사실은 밝혀져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들조차 미궁에 빠져 있을 정도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뒤죽박죽 서랍 속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안목이 필요하고 세상의 어지러움 속에서 한 줄기 진리를 발견하는 일이 이토록 소중한 일이라는 것, 어쩌면 이 혼란 자체가 숨겨진 진리와 진실의 가치를 더해주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안목에 대하여 말하는 책을 읽으며 나는 안목을 가질 수 있는 방법에 앞서 그 안목이 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가 적어놓은 저 목차를 보면서 인생을 살아가며 만나는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 속에서 진위를 가리고 나에게 정말 필요한 진리를 찾아내는 안목을 갖기 위한 작은 실마리를 얻는다.      


언젠가 한 번쯤은 그가 일하고 있다는 코르시카 섬의 미술관에 가보고 싶다.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라는 그 아작시오 미술관에서 깐깐한 눈을 새침하게 뜨고 꼭 다문 입으로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한번 보고 싶다. 어쩌면 목소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울 수도 있다. ‘봉쥬르’ 하고 인사를 하면 가볍게 목례를 하며 받아 줄지 모르는 일이다.   


봉쥬르, 무슈











매거진의 이전글 대단한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