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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Dec 08. 2021

일방적인 이별 통보, 그 후

청천벽력 같은 이별 통보  후 일주일이 지났다

청천벽력 같은 이별 통보 1주일이 지났다.

만남이 느닷없는 것처럼 이별 또한 기별없이 찾아왔다.

도무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카카오톡의 메시지는 1이란 숫자가 지워지지 않고

전화는 “고객님이 전화를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라는 건조한 음성만이 들린다.

설마 설마 했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혹시나 가벼운 감기처럼 지나갈까하여 하루가 멀다하고 메시지를 남기고 전화를 걸고

음성을 남기지만 여전히 소통 불능이고 연락 불통이다.


한 번도 흥분해 싸운 적은 없었다.

심하게 말다툼을 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일까.

면역이 없기에 기침 한 번에 격한 통증을 겪게 되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 사계절을 지났는데 이렇게 쉽게 끝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최소한 설명이라도 해줘야 하지 않는가.

하루 아침에 차단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지 않나.

 ​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침묵이다.

뭐라고 화를 내면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할 텐데

침묵이란 가장 강력한 무언의 폭력이다.

철저한 방어막, 그것을 뚫을 힘이 내게는 없다.


회사라도 찾아가 볼까, 스토커처럼 그럴 수는 없겠지.

집앞에서라도 기다려 볼까, 찌질이같아 그 짓도 할 수 없다.

만남에 예의가 있 듯 이별에도 무례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어쩌면 냉담한 그녀의 얼굴을 감당할 용기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전혀 모르는 그녀, 아니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그녀가 있을까 봐 두렵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았으나 ​머리가 하얗게 되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어렴풋이 무언가 실마리가 잡힐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쩌면 그녀가 불통이 아니라 내가 불능이 아니었던가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일었다.

그녀는 말했었다. 나라는 사람은 “감정” 이라는 것을 표현할 줄 모른다고.

아니 감정이라는 것을 너무도 누르다 보니 실제로 본인조차 의식하지 못지 못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나는 “마음”이라는 책으로 사람의 감정을 공부하 듯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음은 소세키 작가의 일본 근대 소설이다)

사람들과 오래도록 소통하지 못하면 편도체 이상이 생겨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감정표현 불능증, 알렉시티미아(Alexitimia) 라는 병명이다.

무표정하고 경직된 자세와 굳은 얼굴을 보이며 심리적 위험 신호를 무시한다.

그녀는 내가 잘 욷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웃을 때는 본인이 민망할 때 뿐이라고 말했다.

 네이버의 검색은 다음의 특징을 기술한다.

알렉시티미아는 이성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에 조직이나 현실 체계에 잘 적응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정확한 순서와 체계를 따르는 행동과 논리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단, 삶의 장면들을 단조롭고 지루하게 말하는 경향성을 통해 감성 인지 능력과 관련된 장애가 있음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개인들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상상력, 직관, 감정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

사람에게 반응하지 못하는 대신 이들은 사물에 주의를 집중하며 자신을 로봇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별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자체가 벌써 문제이다.

나는 충분히 그녀의 대화와 몸짓을 통해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 보았어야 했다.

촉촉히 젖어있는 그녀의 눈망울을 보며 그녀의 영혼과 소통했어야 했다.

나는 그녀의 장황한 말을 인내하며 다 들어주었지만 머리 속으로는 종종 다른 생각에 빠져 집중하못했으며 그녀가 말하는 내용을 간파하지 못할 때가 훨씬 많았다.

영혼이 없는 듣기였을 뿐이었다.

소통은 언어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 진심으로 하는 영혼의 영역인 것이다.

나는 최근 책 읽기에 다시 집중하고 있었다.

책의 문장들을 읽으려고 했지 그녀의 마음 속을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새벽기차를 타고 함께 놀러간 정동진에서도

나는 책 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따라 책을 읽지 않고 나를 관찰하였다.

그리고, 참았던 듯 그녀는 말했다.

자신의 브런치 글을 왜 읽지 않느냐고.

사실, 그녀가 브런치 작가로 등단하여 글을 썼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한 번 쓱 보고는 말았다.

다시 들어가 찾아볼 생각은 깜빡 못했고, 그렇게 짧은 시간에 글을 몇 편이나 올린 줄은 몰랐었다.

검색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몰라서 그녀의 지시대로

바로 들어가 글을 읽고 “좋아요” 를 누르며 “됐지?” 하고 말했다.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니 이 바보 멍충아.)


내가 읽는 책은 북모임까지 나가며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는데 그녀의 글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도 '마음'이란 책을 읽으며 가장 소중한 그녀의 마음을 외면했다)

그녀는 작가이고 예술가 타입이다.

그런 그녀의 작품 세계를 나는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조차 없었던 것을 이제야 반성한다.​

작품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의 정신세계, 영혼을 알지 못하는 것은 치명적 결함이다.

늘 관심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했던 그녀.


그녀가 말했던 넋두리가 하나둘 씩 뒤늦게 떠올려지며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듯 톡톡 자극한다.

 " 동료들을 보니 다들 남친이 전화로 춥지않냐고                     

 물어보던데...

 전화 한 통도 없고 문자 하나두 없네..."

내가 느꼈던 안정감은 그녀에겐 무심함으로 비쳤던 것일까.

나는 그녀를 너무 외롭게 시들게 방치한 것은 아닌가.

집으로 오는 걸 그닥 내켜하지 않는데  밤늦게 홀로 보내지 않았는가.

내가 남자친구로서 직무유기는 아니었던가.

토요일, 일요일을 내 취미생활을 위한 일정으로

임의대로 정한것이 뒤늦게 후회가 된다.

그녀가 일전에 카톡으로 보내준 자작시가 떠오른다.

너 없는 주말, 딱 그만큼의 구멍이 나서

내 마음은 도너츠처럼 비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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