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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인 Feb 07. 2021

차를 마시는 시간

붙잡아두고 싶은 시간에 관하여



 출판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창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전부인 사무실. 숨 막힐 듯 조용해서 낯설게만 느껴졌던 이 적막한 공간에서 책을 곁에 두고 일을 해온 지도 벌써 8개월이 흘렀다.


 온종일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고군분투하다 보면 나라는 사람이 하루에 쓸 수 있는 기운의 총량 중 너무 많은 부분을 이 전자기기 하나에 쏟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럴 때면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의 팀장님께 컵을 살며시 들어 보인다. 한 손에는 차, 다른 한 손에는 컵을 들고 휴게실로 향한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아 사라질 쯤이면, 지난해 꽃이 피었던 자리에서는 새로운 잎이 돋아나고 어느새 꽃도 핀다. 캐모마일의 경우 이전 해에 자랐던 것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새 잎이 샘솟는다. 뾰족뾰족한 톱날을 닮은 잎이 화단 여기저기에 퍼져있는 모습을 보고 '설마 캐모마일이 여기까지 번진 거야?' 하며 그 자생력에 놀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캐모마일은 3년째 봄을 잊지 않고 매년 찾아온다.


 엄마가 다른 꽃보다도 캐모마일을 가장 먼저 화단에 심은 이유는 자신의 딸이, 그러니까 나의 언니가 캐모마일 차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캐모마일 씨앗 한 뭉치를 천 원에 구매했다. 어릴 적 학교 준비물로 들고 갔을 법한 씨앗 포장지에 캐모마일 사진이 큼지막하게 박혀있다. 비닐하우스 안에 일정한 간격을 두어 씨앗을 하나둘 심고, 온전히 자라기 시작할 쯤에는 화단으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분명 언니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시작한 캐모마일 키우기였는데, 정작 차가 완성되고 보니 이 차를 즐기는 사람은 꽃차를 만든 엄마와 나 둘이었다.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다가 애정도 자라났나 보다.



 캐모마일은 아침에 피고 밤에는 그 꽃을 오므리기 때문에 낮에 따러 나가야 한다. 해가 중천에 떠있을 쯤에는 벌도 꿀을 따러 화단으로 모여든다. 바로 옆에 벌이 날개를 윙윙대며 꽃에 앉아 꿀을 모으고 있는 상황이지만 사실 서로의 꽃만 건들지 않으면 위험할 일은 없다. 다만 서로에게 서로가 위협적인 존재임은 분명하므로, 한낮보다는 약간 찬 기운이 느껴지는 오전 시간에 꽃을 따는 것이 좋다. 거리를 지키며 각자의 일을 한다. 벌도 인간도 작은 꽃 하나에 매달리는 모습에 쿡쿡 웃음이 난다.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계란 프라이처럼 생긴 캐모마일의 노른자 부분이 납작한 꽃을 골라야 한다. 노란색 부분(암술과 수술)의 높이가 높고 단단한 채 연둣빛으로 변했다면 이미 수정된 상태로, 꽃은 곧 꽃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씨앗을 만들 준비를 한다. 반대로 노란색 부분이 납작할 때는 꽃이 연하고 부드러워 향도 좋다.


 적당한 꽃을 골랐다면 이제는 꽃을 딸 차례. 이 과정에서 엄마와 나의 성격차이가 드러난다. 손으로 많은 꽃잎들을 훑으며 한 번에 여러 송이를 따는 엄마와 한 송이 한 송이 골라서 따는 나. 줄기가 정 신경 쓰이면 나중에 다듬으면 된다는 엄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할 때 깔끔하게 하고야 말겠다는 집요함을 가진 나. 우리는 서로의 방식을 존중해주기로 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꽃송이를 모았다. 나중에 완성된 꽃 찻잎을 보니 엄마 말대로 줄기는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혼자서 하나하나 땄다면 이만큼 훌륭한 차를 만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캐모마일 꽃송이 따던 날. 이 정도 양으로 한 병이 겨우 나온다.




 꽃차를 만드는 일은 매우 까다롭고 어렵다. 한 알 한 알 딴 꽃을 깨끗이 씻어 건조하고, 찌고, 팬에 열을 올려 덖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 비로소 꽃차가 완성된다. 캐모마일이나 구절초처럼 꽃잎이 흰 꽃은 이 과정에서 꽃잎이 갈색으로 변색되기도 하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캐모마일은 꽃송이 자체가 손톱 크기 정도로 작아서 아무리 많이 따서 만든다고 하더라도 만들어지는 절대적인 양이 적다. 결과물은 적지만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갔는지 알기에 더욱 소중하다.






 오전 열한 시나 오후 네 시처럼 애매하게 힘이 빠지는 시간은 티타임 가지기 좋은 때이다. 내가 일에 지쳐서 혹은 마음이 복잡해 먼저 일어나기도 하고, "찻집 오픈했나요?"라며 팀장님께서 먼저 말을 건네 오기도 한다. 잠시 찾아온 10분간의 휴식 시간. 그날의 기분에 따라 혹은 직전에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에 따라 차를 선택한다. 찻잎을 어느 정도 넣어야 적당한지, 물은 얼마만큼 부어야 좋은지, 얼마 동안 우려내야 하는지에 관해 이야기 나누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심호흡을 한 듯 마음은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는다.


 하루는 어떤 차를 드시고 싶으신지 팀장님께 물었는데, 너는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표정으로 "꽃차."라고 대답하시며 "네가 만든 거니까." 덧붙이셨다. 이날의 대화처럼 붙잡아두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그 시간을 쉬이 지나 보내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과 같이 계속해서 쓰는 일일 테다.




캐모마일을 닮은 구절초 차. 마시는 내내 예쁘다.



 


시골과 도시를 오가는 삶, 여섯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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