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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제와 같이 묵었던 호텔의 1층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짐을 쌌다. 오늘은 맨체스터로 이동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바로 맨유 경기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일전에 밝혔다시피 대학교 CC였다. 나의 남편은 대학교 축구 동아리 회장을 맡을 정도로 축빠였다. 아니 지금도 축빠이다. 그런 남편과 함께 영국에 왔으니 당연히 축구 정도는 봐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신랑은 축구도 잘 모르는 내가 축구 경기를 보느라 시간을 쓰는 것이 미안해 경기를 보자고 선뜻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런던에 올 일이 또 있을까. 우리는 그다지 부유한 편이 아니므로 아마 또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어쩜 이것은 일생일대의 마지막 기회인데 당연히 누려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일생일대 소원이라면 기꺼이 들어줘야지. 나는 직접 맨유 경기 티켓을 구매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클럽에 가입하고 우리 일정에 맞춰 경기 티켓을 구매했다. 아주 좋은 자리를 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자리를 구매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오늘 바로 그 경기를 보러 간다.
어제까지 숙소 문제 때문에 도착한 곳 언저리만 왔다갔다하며 호텔에만 박혀 있던 우리는 이제야 런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비로소 런던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보이는 풍경마다 아름다웠고 그저 거리일 뿐인데, 명소가 아닌데도 아름다웠다. 도시 전체가 아름다울 수 있다니. 여기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이런 풍경을 보면 이 곳도 아름답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구 셔터를 눌러댔다. 그냥 타는 버스 마저도 특별한 느낌이었다.
기차를 타고 이동하며 보이는 풍경은 때로는 우리네 시골 같고 때로는 게티이미지 같았다. 그런 풍경을 보며 2시간 정도를 이동하니 풍경이 달라지며 맨체스터에 도착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해 둔 호텔에 짐을 풀고 경기장 위치를 확인하러 경기장으로 걸어갔다. 거리는 이미 경기의 열기로 들떠 있었다. 나의 신랑도 그만큼 들떠 보였다. 놀이공원 온 어린이마냥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경기를 보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거리에서는 음식을 파는 노점상이나 아마도 짝퉁(?)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으로 가득했다. 어떤 머리 좋은 사람이 바닥에 응원하는 사람에게 동전을 던지도록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역시 창의적이어야 돈을 벌지. 그리고 경기장 주변의 질서를 위해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말을 타고 다녔다! 말이라니.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이 생경했다. 왜 말을 타는 것일까? 오토바이보다 친환경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길에서 버거를 사서 점심을 떼웠다.
우리는 경기장의 위치를 확인한 뒤 호텔에서 경기 시간을 기다렸다. 경기는 오후 6시 45분이였기 때문에 시간은 어느 정도 넉넉했다. 우리는 근처에 위치한 마트에 가서 경기를 보며 먹을 간식을 사기로 했다. 나는 외국에 나가서 마트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작은 슈퍼든 마트든 우리가 평소 보던 것과 다른 상품들을 볼 수 있고 마치 현지에 사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식을 산 것은 그다지 현명한 행동은 아니였다. 테러의 위험 때문인지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가방을 모조리 검사 당할 뿐더러 큰 가방은 소지하고 들어갈 수 없어 아예 모조리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냥 마트에서 과자를 산 사람이 되었다. 아무튼 그깟 과자가 대수랴. 내가 지금 맨체스터에 있는데. 맨유 경기를 보는데. 올드 트래포드에 서있는데.
우리가 본 경기는 챔피언스 리그의 첫 경기였다. 그래서인지 시작 전부터 여러가지 화려한 개막식(?) 비슷한 것이 있었다.
경기는 맨유의 승리였다. 실감나게 경기 리뷰를 써보고 싶지만 나야, 뭐 축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그래도 신혼 여행 오기 전에 맨유 홈페이지에서 선수들 이름을 외우고 가서 아는 얼굴들을 맞추는 재미가 있었다. 포그바가 잘하는 친구라고 해서 기대를 하고 왔는데 부상으로 퇴장을 하게 되어 아쉬웠지만 마지막 골을 넣은 복실복실한 머리의 펠라이니가 맘에 들었다. 전반이 끝난 쉬는 시간에는 혼자 매점에 가서 나쵸도 사왔다. 간식을 빼앗겨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관람을 하며 영어로 응원을 하거나 영어로 욕을 하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가 동양인이라 조금 눈에 띄는 것 같은 기분이였지만 여긴 맨유가 아닌가. 지성팍이 있던. 그래서인지 적대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경기가 끝나고 나니 꽤나 어둑어둑해졌다. 화면으로만 보던 유럽 축구를 실제로 본 신랑은 꽤나 행복해보였다. 신혼 여행에서의 몇시간을 쓴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경기장 밖으로 나오고 나니 기온도 낮보다는 많이 내려가 있었다. 사실 영국의 9월이 이렇게 추우리라 생각하지 않고 조금 두꺼운 옷이라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긴 경량 패딩 뿐이었는데 그 옷을 이렇게 교복처럼 입게 될 줄이야. 경량 패딩을 입었음에도 춥다고 느껴질 정도의 날씨였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집으로 가지 않고 주차장 근처 울타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뭔가 있구나.'하는 느낌이 왔다. 신랑과 나도 그 무리에 껴서 자리를 잡았다. '설마 선수들을 볼 수 있는걸까?' '에이, 설마' 하는 우리 눈 앞에 한명씩 선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