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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 애 Mar 17. 2023

신혼여행에서 맨유 경기 보고 루카쿠랑 사진 찍다(2)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많이 어두워진 경기장 밖

 경기가 끝나고 나오자 비도 왔는지 기온은 많이 떨어져 있었고 이미 깜깜하게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럼에도 가지 않고 주차장 울타리 근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많아 우리도 그 근처를 기웃대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선수들이 한 명씩 나오기 시작했다! 신랑 말로는 약물 검사 등등을 하느라 한 명씩 차례차례 나오는 것일 거라고 했다. 선수들은 한 명씩 나와 어떤 사람은 커다란 버스에 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본인의 차량, 혹은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가기도 했다. 아마도 저 차와 오토바이는 겁나 비싼 것이겠지. 난 그쪽으로는 문외한이라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화면으로만 보던, 멀리서 콩알만 하게 보던 선수들이 눈앞에 지나가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사실 나에게는 그저 외국인 1 외국인 2 일 뿐이지만 신랑에게는 얼마나 더 신기할까. 깜깜한 곳임에도 신랑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내 신랑은 말이 많지 않다. 무언가 요구도 잘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쓰인다. 사실 이번 신혼여행에서도 축구 경기를 두 번 관람하기로 한 것은 내가 우겨서였다. 사실은 세 번 보자고 - 맨유 1경기, 토트넘 1경기, 바르셀로나 1경기 - 처음 제안했으나 축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자주가지 못할 유럽에서 축구를 세 번이나 볼 필요는 없다며 거절하여 두 번으로 합의를 보았다.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의 여행 계획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무슨 축구를 두 번이나 보냐며 신랑에게 핀잔을 주거나 나에게 너무 희생하는 것이 아니냐 했다. 그 사람들은 아마 사랑하는 이의 행복한 눈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자주 빛나지 않는 그 눈이 반짝거리며 얼굴이 아이처럼 밝아진 것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그보다 보기 좋은 것이 없다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사실 경기장에서 나오는 선수들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신랑을 보기 바빴다.


 아침부터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하여 숙소에 간단히 짐만 풀고 이래저래 하다 보니 핸드폰이고 카메라고 충전할 시간이 없었다. 카메라는 이미 꺼져버렸고 남은 것은 간당간당한 휴대폰뿐이었다. 그거라도 꺼지면 안 되기에 우리는 사진 찍기를 아끼고 그 순간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 순간 '후안 마타'라는 선수가 나왔다. 아, 이 사람은 내가 축구팬이 아님에도 이름을 잊을 수가 없다. 산타클로스처럼 더펄더펄 턱수염을 기른 그는 모두가 걸어가는 주차장 방향이 아닌 우리가 서있는 울타리 쪽으로 바로 걸어왔다. 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그려지는 순간, 그는 경기장에서 가장 가까이 서있는 사람 옆에 서더니 함께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순간, 그 울타리에 서있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좋은 사람이었다. 경기를 다 뛰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피곤할 텐데 한 명 한 명 친절하게 옆에 서며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내가 앞으로 이 선수 이름은 외워야지, 후안 마타.라고 되뇌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앞으로 와서 우리와도 사진을 찍어 주었다.


참으로 좋은 인상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지나간 곳은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다들 생각보다 싸늘한 밤공기에 몸을 움츠리고 멀리 지나가는 선수들의 실루엣만 보며 조용히 '오.. 오..' 하던 중에 그가 보여준 팬서비스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모두들 한껏 달아올라 훨씬 상기되고 훨씬 초롱초롱한 눈으로 선수들이 나오는 입구를 더욱 열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마타 이후로 나오는 선수들은 이전 선수들과 같이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들의 차량으로 걸어갔고 달아올랐던 사람들의 열기는 금세 짜게 식었다. 그 반작용 탓일까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10명도 채 안 되는 듯 보였다. 그중에 커플은 우리 부부와 또 하나의 커플, 딱 둘 뿐이었다. 다른 커플은 스페인계 커플로 보였는데 부부 같지는 않았다. 온도는 점점 더 내려갔다. 남자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미니스커트와 높은 구두를 신은 그녀는 점점 울타리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여전히 울타리에 붙어 있었고 그녀는 그런 그의 뒤통수를 조준하여 째려보기 시작했다. 그럴만한 날씨였다. 경량 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한 나마저 코를 훌쩍거릴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울타리에 붙어 있는 남자친구와 망부석 같은 다른 남자 팬들을 보며 내가 물었다.



"왜 다들 안 가고 있는 거야? 누가 안 나왔어?"


"루카쿠가 안 나왔어. 요즘 잘 나가는 선수거든."



 나름 경기를 즐기기 위해 EPL 관련 책도 읽고 맨유 홈페이지도 연구하고 온 나도 얼핏 보았던 그 이름. 그 선수가 안 나왔다고 한다. 게다가 오늘 우리가 관람한 경기에서 골도 넣었기 때문에 다들 그 얼굴을 보고 싶은 눈치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한참이 지나도 루카쿠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 외에 유일한 여성인 미니스커트의 그녀는 점점 울타리로부터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고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의 강도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울타리에 붙었다, 그녀에게 붙었다 선수들이 나오는 문을 애절하게 바라보다 그녀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다 이래저래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결국 잠깐 볼 루카쿠와의 기쁨보다 오래 함께할 그녀를 택했다. 그녀와 함께 빠르게 멀어져 가는 그는 가는 길에도 슬쩍슬쩍 선수들이 나오는 문을 쳐다보았다. 사실 나도 춥긴 했는데 우린 더 먼 길을 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왕 기다린 거 조금 더 기다려서 미련을 남기지 않는 편이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그래, 루카쿤지 뭔지 보고 가자. 나는 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나도 루카쿠는 나오지 않았다. 신랑의 눈의 반짝임도 많이 죽어가고 아까 10명 남짓하던 사람은 어느새 5명 남짓한 인원으로 줄어 있었다. 


"우리도 갈까?"


 신랑이 물었다.


"10분만 더 기다리자."


 나는 사실 그 루카쿠라는 친구가 뭐 하는 친구인지도 잘 모르긴 하는데 내가 아는 것은 난 근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왕 런던까지 왔는데, 거기서 또 맨체스터까지 왔는데, 이만큼 기다렸는데. 포기하지 말자,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시계를 보며 덜덜 떨고 있던 그 순간.


문이 열리네요 -

그대가 들어오죠 -


루카쿠가 나왔다.

그리고 울타리 쪽으로 걸어왔다. 짜식, 너 좋은 놈이구나.(93년생으로 나보다 어리고 또 볼일 없으므로 잠시 말을 놓겠다.) 그래도 기다린 팬들이 고마운 것인지 아니면 구단에서 시킨 것인지 그 친구는 약간 낯 가리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우리 쪼긍로 걸어와한 명씩 사진을 찍어 주었다. 나는 아까 마타와 찍은 사진에서 끼여 찍은 남편이 마음에 걸려 내가 찍어줄 테니 둘만 찍으라고 했다. 사실 난 누군지도 잘 모르는데 내가 굳이 같이 찍겠다고 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선수들이 빠르게 찍고 사라지므로 좋은 구도를 잡을만한 여유도 없으니까. 드디어 우리 앞으로 다가왔고 신랑은 루카쿠와 사진을 찍었다. (어쩌다 스텝 아저씨도 함께 찍었다.)


해맑은 신랑과 루카쿠와 스텝 아저씨


 울타리에 남아있던 소수의 사람들은 그제야 모두 만족한 얼굴로 발길을 돌려 경기장을 떠났다. 경기장에 남아있던 몇 개의 불도 꺼지기 시작했다. 아까 그 자꾸 뒤를 돌아보던 그 커플이 사라진 지 5분 만의 일이었다.


'그 총각, 아깝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루카쿠 봤을 텐데.'


 숙소는 경기장으로부터 걸어서 8분 정도의 거리라 우리는 어둠 속에서 종종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밤길은 어둡건만 신랑의 얼굴은 밝았다. 여한이 없어 보이는 얼굴. 난 저 얼굴이 보고 싶어 대략 30분 이상을 추위에서 떨었다. 나도 여한이 없었다. 그에게 여한 없는 시간을 줄 수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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