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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당근 Nov 26. 2021

넌 할 수 있어

직장을 그만두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언제든 마음이 내키면 어디론가 휙 떠나는 거였다. 시간에 쫓겨 잠시 스쳐 지나가는 여행이 아닌, 낯선 곳에서 혼자 살아 보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 회사를 나오고 나니 생각처럼 쉽게 아무 때나 떠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직장에 매여 있지 않기에 물리적인 시간은 많아졌지만,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이유는 직장에 다닐 때만큼이나 여러 가지였다. 거기에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팬데믹 상황은 번번이 떠나려는 마음을 주저하게 하는 강력한 이유가 되었다.

잠시 기다리면 끝날  같았던 팬데믹 상황은 이젠 일상이 되었고, 작년에  수술을 받으신 아빠도 어느 정도 건강과 안정을 되찾아 가면서 이번엔  ‘떠나야겠다 마음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퇴사할  계획했던 외국에서의 한달살이는 지금 상황에선 무리고, 그렇다면 선택지는 우리나라에서   있는 가장  , 제주로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는 부모님의 병원 일정 등을 피해 집을 떠날 수 있는 시간은 한 달 남짓. 마음먹었을 때 떠나야겠단 생각에 이것저것 알아보지도 않고 덜컥 지낼 방부터 예약했다.

여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예산을 세우는 것부터 시작해 숙소, 맛집은 물론이고 매일매일의 동선과 현지의 교통편 시간까지 엑셀 표로 정리할 정도로 미리 꼼꼼하게 계획하는 이들에서부터 숙소와 비행기표만 예약하면 다른 것들은 여행 가서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이들까지 여행하는 방식은 참 다양하다. 나는 후자에 가까운 스타일이지만 그래도 이번엔 며칠 떠나는 여행도 아니고 거의 한 달을 지내야 하는데,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떠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동안 여행은 많이 다녔지만 유럽이나 미국 등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늘 친구들과 함께였고, 혼자 집을 떠났던 경험은 대학 시절 캐나다 어학연수 3개월이 전부였다. 그때도 별 준비 없이 낯선 곳에 홀로 떠나는 게 두려웠다. 그래도 막상 가서는 금세 친구들을 사귀어 하라는 어학 공부는 안 했어도 신나게 놀며 잘 지내다 왔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나이를 얼마나 더 먹었으며, 게다가 제주는 우리나라 말이 통하는 곳 아닌가. 그런데 혼자 제주 한 달 살기가 뭐라고 걱정을 하냐고.

그렇게 제주에 가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낼지에 대한 생각은 제쳐 두고 떠날 날만을 카운트다운 하며 그저 떠난다는 것에 마음이 붕 들떠 있었다.

떠나기 전날이 되어서야 분주하게 집안을 왔다갔다하며 급하게 짐을 쌌다. 그러다 방에 있던 전신 거울을 밀어 와장창 깨뜨리는 사고를 쳤다.


‘에이, 거울 깨면 삼 년 재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야, 아냐. 난 미신 같은 거 믿는 사람이 아니지.’


불쑥 드는 찝찝한 생각을 애써 밀어내며 사방으로 날아간 거울 유리 파편을 끙끙거리며 치웠다.

그런데 다음 날 집을 나서기 직전,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짐을 다 싼 후 여유를 부리며 커피를 마시다 텀블러에 가득 담긴 커피를 몽땅 쏟은 것. 캐리어와 함께 가져가려고 둔 보스턴백에 들어 있던 노트북과 다이러리, 책 등이 순식간에 아메리카노에 젖어 커피가 뚝뚝 떨어졌다.


“오 마이 갓!”


내 부주의지만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물건들과 바닥으로 흐르는 커피를 정신없이 닦아 내며 욕지거리가 다 나왔다. 그러다 불현듯이 드는 불안감.


‘자꾸 이게 뭔 징조지? 나 떠나도 되는 거야? 혼자 가서 잘 지낼 수 있을까?’


버스 타는 곳까지 짐을 들어 주며 다 큰, 아니 엄청 나이 먹은 딸 마중까지 나온 엄마 아빠에게 환하게 웃으며 “잘 다녀올게!”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며 버스를 탔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힘이 쭉 빠졌다.

이상야릇한 이 기분은 뭘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가는데 버스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세상이 너를 무릎 꿇게 하여도

당당히 네 꿈을 펼쳐 보여 줘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할 수가 있어 그게 바로 너야

굴하지 않는 보석 같은 마음이 있으니


평소 같았으면 그냥 흘려들었을 이 오래된 노래가 마음에 콕 박혔다. 꼭 누군가 내게 ‘넌 잘 할 수 있어.’ 하며 생각지도 못한 노래를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찜찜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스르륵 사라졌다. 제주로 떠나는 나를 격려하고 응원해 주는 것만 같아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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