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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당근 Dec 15. 2021

제주를 버스로 여행하고 싶다면

나는 무사고 15년 차 장롱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다. 운전면허를 따겠다 마음먹던 당시만 해도 면허만 따면 가고 싶은 곳에 언제든 자유롭게 다니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의 실기 시험 낙방 끝에 어렵게 어렵게 면허를 따면서 난 운전이 적성에 맞지도 또 재능이 있지도 않음을 단박에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바로 운전을 시작했더라면 지금쯤은 베스트 드라이버까진 아니더라도 살살 차를 끌고 다닐 정도는 되었을 텐데, 시험 이후론 운전대와는 영영 이별을 해 버렸다.

 결과 나는  넓은 제주를 버스와 튼튼한  다리로 여행하고 있다. 물론 언제 어디서든 앱으로 ** 택시를 부르면   안에 달려와서 나를 원하는 곳까지 빠르게 옮겨다 준다. 하지만 제주란 땅이 어찌나 넓은지 끝도 없이 올라가는 미터기의 숫자를 매번 백수가 감당하긴 버겁다.

차가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코스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지만, 버스 여행은 버스 시간에 내 스케줄을 일정 부분 맞춰야 한다. 제주에서는 노선에 따라 다르긴 해도 해안을 따라 도는 급행과 간선 버스는 대략 20분에 한 대씩은 운행하기 때문에 유명 관광지는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는 편이다. 문제는 해안가 유명 관광지를 조금만 벗어난 곳에 가려면 지선 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 어떤 버스는 하루에 몇 대만 운행하기도 한다는 것.

나는 차 시간을 대충 앱으로 그때그때 찾아보고 다녔던 터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나갔다가 갈아타는 곳에서 오지 않는 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낭패를 몇 번 겪었다. 처음엔 시간에 쫒겨 다니는 여행도 아닌데, 기다리는 게 뭔 대순가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혼자 마냥 기다리고 있자니 느긋한 마음은 어느샌가 사라져 버리고, 돌아올 차 시간표를 찾아보며 목적지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하기에 바빠졌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홀로 버스를 기다릴 때는 이 동네엔 정말 아무도 살지 않는 걸까 싶을 정도로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없다가 버스가 올 시간 즈음이 되면 어디선가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는 거다.


”지금 몇시우꽈?“


한번은 갈아타는 버스와 시간이 맞지 않아 정류장에서 한참을 혼자 서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오시더니 내게 시간을 물으셨다. 시간을 알려 드리니 이제 곧 올 거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저기서 달려오고 있는 버스. 오! 제주에 사는 분들은 교통 앱 따위 없어도 버스 시간을 꿰고 계신 모양이었다.

어쨌든 오매불망 버스를 기다리며 든 생각은 제주를 버스로 여행하려면 미리미리 일정을 꼼꼼하게 계획하고 관리하는 스타일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버스 운행 시간 정도는 미리 살펴보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겠단 거다. 한낮의 뜨거운 땡볕에서 혹은 우산이 뒤집어질 정도의 거센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아니 그냥 날씨가 좋은 날이라 해도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서 한 시간 넘게 버스를 기다리면서 ’이것도 다 추억이지.‘ 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호탕함을 지닌 이라면 상관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버스 여행이 느리고 시간 제약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의외의 재미와 즐거움도 크다.

차로 이동하면 금방 갈 수 있는 거리를 이 동네 저 동네 돌아가는 버스라도 타게 된다면 시간은 배도 더 걸리지만 관광지가 아닌 제주의 일상을 마주할 수 있다. 차곡차곡 쌓은 까만 현무암 돌담, 겨울인데도 아직 푸릇푸릇한 텃밭, 돌로 만든 아담한 옛날 집들과 마을도 구경하고, 오일장을 다녀오시는 듯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나 기사님과 동네 삼촌(아저씨를 삼촌이라 부르는 것 같다.)의 대화를 주워들을 수도 있다(못 알아듣는 제주말이 태반이지만.), 또 택배 기사님이 버스 기사님에게 물건을 건네주며 어느 정류장에 전해 달라는 신선한(?) 광경을 목격하기도 한다.



버스에서 내려 걷는 동안에는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들과 작은 꽃들을 발견하고 맘껏 사진으로 담을 수도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시인의 말처럼 차로 빠르게 지나가면 볼 수 없는 것들을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걸으며 만난다. 이따금 차만 지나다니고 사람 한 명 볼 수 없는 동네의 넓은 길을 나 혼자만의 길인 양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개의 ”컹컹“ 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 뛰다가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하는 여행길이 재미있다.

아, 그리고 운전하며 여행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일! 맛있는 음식과 함께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의 낮술은 버스 여행의 보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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