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 해부학
2011년, TV 애니메이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충격 속을 돌고 돈 끝에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마법소녀의 존재를 고찰하는 명작으로 탄생하였다. 희망이라는, 마법소녀 장르의 정석을 비틀어 절망의 구렁텅이에 소녀들을 빠뜨린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이고자 하는 모습 속에서 장르의 근원을 파헤쳐, 끝내 얻어낸 의미와 함께 정석으로 되돌아와 존재의의를 설파하는 연출과 이야기 구조는,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들에 대하여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TV 애니메이션 <마법소녀를 동경해서>는 그러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성취를 13년이 지난 2024년에 이르러 재현함과 동시에 발전시킨 걸작이다. 미법소녀의 존재의의를 설파하기에 앞서 복잡하고 방대한 설정들로 기초를 다져야만 했던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와는 달리, 기존의 마법소녀의 반대 시점을 조명한 다음 수단을 부여하는 것만으로 준비를 끝마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궁금해진다. 시선과 수단이란 무엇이며, 그것들은 어떻게 마법소녀의 존재의의를 고찰하고, 드러내어 끝내 설파해내는가?
마법소녀 해부학
TV 애니매이션 <마법소녀를 동경해서>가 마법소녀라는 존재를 파헤치기 위하여 꺼내드는 이론은 ‘해부학’이다. 서론에서 이야기한 ‘비틀기’는 지금부터 이야기할 마법소녀 해부학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시작 단계이다.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가 ‘발랄하고 깜찍한 희망’ 대신 ‘충격적이고 암울한 절망’을 내세우는 분위기의 비틀기를 시도했다면, <마법소녀를 동경해서>는 화자, 즉 주인공의 시점을 뒤바꾸는 비틀기를 시도한다. 일반적인 마법소녀 장르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마법소녀이다. <마법소녀를 동경해서>는 바로 그 사실을 비튼다. 마법소녀가 아닌, 그녀들을 상대하는 악의 조직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때로는 타인이 나에 대하여 더 깊고 자세하게 이해할 때가 있다. 시점의 차이, 그 하나만으로도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이는 마법소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때로는 마법소녀의 시점보다도 그녀들을 상대하는 악의 조직의 시점을 통해 마법소녀의 존재를 더 깊고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해부학은 ‘비틀기’라는 서론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시점을 비틀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으로 마법소녀를 해부하여야 할까? 여기서 우리의 주인공 히이라기 우테나, 악의 조직 에놀미타의 총수 마지아 베제는 에로스라는 수단을 꺼내든다. 마지아 베제는 자신의 에로스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디즘의 마수를 펼친다. 마법소녀 트레스 마지아는 그런 마지아 베제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할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법소녀들은 ‘꺾이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지아 베제는 자신의 에로스를 충족한다. 그녀가 에로스를 충족시키는 방식은 그저 자신의 가학에 대한 상대의 반응을 즐기는 사디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물론, 마지아 베제는 사디스트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디즘으로는 그녀의 에로스를 충족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마지아 베제는 사디즘을 통하여 어떠한 목표를 달성시키고자 하며, 그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비로소 에로스 역시 충족되어 끝내 만족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를 사디스트의 스테레오 타입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목표에 대하여 상기하여야 한다.
목표의 정체는 이미 제시되어 있다.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끝내 다시 일어서서 모두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마법소녀의 존재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지아 베제의 목표이자 에로스이다.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히이라기 우테나는 기꺼이 마지아 베제로 거듭난다. 그리하여, 마지아 베제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압도적인 힘을 사디즘으로 돌려내어 꿈과 희망의 마법소녀라는 사랑의 존재를 해부하기 시작하고, 결국 꿈과 희망으로 가려져 있었던, 마법소녀의 모든 치부와 기저에 깔려있던 타락심은 낱낱이 드러나고 만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마법소녀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타락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붙잡아, 끝내 꿈과 희망의 마법소녀로 남는다. 마법소녀 오타쿠 히이라기 우테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신의 에로스를 충족한다. 그 에로스는 이제 시청자인 우리에게로 이어진다. 히이라기 우테나에게 있어 마법소녀의 존재를 목도하는 것은 욕망의 충족이다. 그러나, 화면 밖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연구로 인지될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있어 마법소녀란, 어느새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을만큼 오랫동안 이어져온 장르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장르 자체를 메타적으로 연구하여 총망라하는 작품이 하나쯤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등장했다. 하지만, 불완전하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는 결정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마법소녀에 대한 사랑이 담겨 만들어진 작품이라기보다는, 장르를 기계적으로 분석하고 비틀어 재구축한, 딱딱한 작품 같다. 그렇기에 연구의 결과는 불완전해진 것이다. <마법소녀를 동경해서>는 그 불완전 속에 사랑을 채워넣어, 끝내 완전하게 만든다. 히이라기 우테나는 마법소녀를 ‘사랑하기에’ 기꺼이 반동인물 마지아 베제의 시점에서 자신의 사랑을 해부, 끝내 그 본질과 마주한다. 이것이 바로 연구를 완벽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사랑해야만 파고들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서 해부된 모든 것은 사랑의 이름 아래 하나로 합쳐지고, 근원을 향하여 되돌아온다.
마법소녀에 대한 사랑으로 탄생한 사디스틱 에로스는 마법소녀의 존재를 일깨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그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악의 조직 에놀미타는 총수 마지아 베제를 필두로 마법소녀 트레스 마지아를 끝없이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럼에도 소녀들은 꺾이지 않는다. 치부가 드러나고, 타락할지도 모르는 순간에도 끝내 일어서서 마을을 구하고 꿈과 희망을 전한다. 그 순간, 시점은 원래대로 돌아온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트레스 마지아는 이제 ‘주인공으로서’ 늘 그랬듯이 악의 조직 에놀미타를 저 하늘 높이 날려버린다. 이것이 바로 마법소녀 해부학이라는 예술적 연구의 결론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하여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비틀린 시선 속에서 그 존재를 해부하면, 본질은 드러난다. 그 순간, 시점은 근원으로 되돌아오고, 드러난 본질은 당연한 시선 속 당연한 순간을 보다 당연하게 만들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이해시킨다. <마법소녀를 동경해서>는 그러한 방법론을 마법소녀의 존재와 결부시켜 제시하고, 끝내 꺾이지 않는 꿈과 희망의 마법소녀라는 장르의 본질, 모든 것을 증명한다.
‘제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시의 ‘증명’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바로 <마법소녀를 동경해서>가 걸작인 이유이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오며 정립된 마법소녀의 본질을 제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제시를 증명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과 분석, 그리고 표현력이 필요하다. <마법소녀를 동경해서>는 그러한 증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작품이다. 단순하다면 한없이 단순한 마법소녀의 본질, 진정한 존재의의를 세밀한 사디스틱 에로스를 통하여 해부 및 표현하고, 끝내 화면 속으로 조명해내는 섬세한 과정에 우리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 애니메이션을 천박함만이 가득 담긴 망상 덩어리일 뿐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까지의 뜻을 절대로 굽히지 않을 것이다. TV 애니메이션 <마법소녀를 동경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앞에 탄생한 모든 마법소녀의 존재를 전부 품은 채 딛고 일어선 다음, 그들을 대표하여 화면 밖에 선언한다. ‘우리는, 마법소녀는 그리하여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걸작의 탄생을 목도하게 된 전말이다.
총평
무엇이든, 누구든 극한을 뛰어넘게 된다면 인정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TV 애니메이션 <마법소녀를 동경해서>는 그러한 나의 생각에 실로 들어맞는 작품이었다. 나는 소위 ‘천박한’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성적 어필만으로 시청자를 끌어모으는 빈 껍데기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소녀를 동경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마법소녀를 동경해서>는 천박한 작품이 맞다. 그러나, 천박한 타 애니메이션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갖고 있다. <마법소녀를 동경해서>의 천박함은 주제와 긴밀하게 이어져 소통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 기준치를 아득히 뛰어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를 격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예술이다! 그리하여, 나는 최종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TV 애니메이션 <마법소녀를 동경해서>는 에로스의 걸작이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랑해 온 존재를 해부한 끝에 그 본질을 되새기도록 만드는 천박함을, 우리는 더 이상 ‘천박함’이라는 이름으로 고정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신의 이름을 빌려 칭해진 예술적 선언, ‘에로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