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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Mar 31. 2024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겹쳐지는 우연의 인간과 오만


인간은 오만하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감상하고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를 '오만함'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생태주의에 입각한 인간 비판 영화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생태주의의 존재를 그저 영화의 재료 중 하나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사실 비판까지 가는 것도 무리일지 모른다. 나는 하마구치 류스케를 끊임없이 바라본 끝에 드러나는 무언가를 포착하는 감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드러내어 촬영하지 않는다. 그저 상황을 만들어두고 드러나는 것을 촬영할 뿐이다. 생태주의는 바로 그 상황이며, 비로소 오만함은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진가 역시 드러난다. 그는 촬영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연의 요소를 준비해 둔 상황에 조화시켜, 끝내 자신의 의도대로 드러나는 장면들을 포착하는 명수이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연들이 쌓여 드러난 인간의 오만을 포착하여 그 진가를 증명해 낸다.

 

오만한 자들이여, 저울을 들고 있는 것은 그대들이 아니다

나는 앞서 이야기했다. 이 영화에 있어 생태주의의 존재는 그저 영화를 구성하는 재료 중 하나일 뿐이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이다. 작중의 인물들은 전부 오만하다.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풀려나갈 것이라고 오만하게 믿는다. 연예 기획사의 사장은 자신의 말대로만 행동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고 오만하게 생각한다. 타카하시는 제대로 배우기만 하면 자신이 하라사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글램핑장의 관리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오만하게 생각한다. 여기서 누군가는 의문을 표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타카하시는 자신의 속한 회사의 잘못된 생각을 인지하고 하라사와와 회사 사이에서 열심히 동분서주하는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렇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카하시는 오만하다. '이렇게 하면 해낼 수 있겠지' 하고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은 채 행동하는 것, 그것은 오만이다. 그리하여, 플레이모드와 그 직원들은 자신들의 오만한 목적을 위하여 오만하게 하라사와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렇다면, 하라사와의 주민들, 일명 '개척 이주민'들은 어떠한가?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그들은 하라사와의 선주민으로서 오만하게 하라사와의 발을 들여놓아 고향의 자연을 파괴하려고 하는 플레이모드와 그 직원들의 횡포에 피해를 입는 인물들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역시 파괴자이다. 개척 이주민들은 이후의 파괴자들보다 하라사와에 발을 들여놓은 속도가 빨랐을 뿐, 결국 자연을 파괴하는 것으로 살아온 자들이다. 그저 본인들 스스로가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이 후발자와는 다를 뿐이다. 여기까지는 파괴자의 자아성찰로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오만해진다. 그저 빨랐을 뿐 똑같이 자연을 이용한다는, 후발자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파괴자들이 어째서 자연의 이름을 등에 업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균형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는 것인가? 결국, 인간은 순서의 차이만으로도 주인의 의식을 갖고 오만해져버리고 마는 생물인 것이다. 그 사실은 꽤나 충격적인 엔딩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화의 후반, 갑작스럽게 실종된 하나는 치명상을 입은 사슴과 마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발견된다. 이전에 타쿠미는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야생 사슴이 인간을 공격하게 된다면, 치명상을 입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 그 치명상을 입은 사슴은 하나와 마주하고 있다. 여기서 영화는 은유적이게 된다. 타쿠미는 사슴과 하나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곧바로 타카하시를 살해한다. 그것은 사슴으로 은유되는 자연과, 자연을 파괴하며 살아가는 인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일종의 의식처럼 보인다. 타쿠미는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은 지금 치명상을 입고 하나를, 우리 개척 이주민들을 공격하려 하고 있다.’ 타쿠미의 입장에서 그 치명상을 입힌 것이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그래서 타쿠미는 타카하시를 살해하여 균형을 유지하고 자연을 달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연은 하나를 공격한다. 어째서일까? 여기서 우리는 오만의 존재를 되새겨야 한다. 애초에 자신들을 균형의 수호자로 생각하는 것부터 오만하다!

 

개척 이주민을 대표하는 모두의 심부름 센터 타쿠미는 자신들이 먼저 하라사와에 도착했으므로 자신들은 자연으로부터 자연과 인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사명을 대리받은 자들이라고 오만하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오만에 따라, 타쿠미는 파괴자들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자연 앞에서 그 파괴자들을 없애는 것으로 균형을 유지하면 또 다른 개척 이주민의 대표 하나가 자연에 의해 공격받지 않으리라고도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타쿠미와 개척 이주민들은 대리자는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들 역시 저울 위에 올라가 있는 존재들이다. 그 이유는 모두가 알고 계시리라.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타쿠미가 속한 개척 이주민들 역시 파괴자인 것이다. 재미있게도, 그것은 타쿠미 스스로가 자백한 사실이기도 하다. 결국, 개척 이주민들은 사명이라는 오만한 생각으로 자신들의 이기심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척 이주민들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자연에 비집고 들어오려고 하는 플레이모어의 행위를 치명상으로 간주하여 공격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하나 역시 공격받아 죽는다. 개척 이주민들이 자신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고 간주한 플레이모어를 공격한 것처럼, 자연 역시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개척 이주민들의 대표 하나를 공격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하여 균형은 유지된다. 타쿠미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균형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 시점의 오만한 생각이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히려는 두 집단이 있다면, 두 집단 모두 배제하는 것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길이 아닐까? 결국, 저울을 든 것은 자연이며, 개척 이주민과 플레이모어, 두 집단은 접시 위에 올라가 있는 존재들일뿐이다. 그리고, 자연은 두 존재를 모두 배제하여 균형을 유지함과 동시에 인간의 오만을 드러낸다. 여기서 바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진가가 드러난다. 감독은 인간의 오만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우연의 행위를 통하여 조금씩 쌓여가는 인간의 존재를 자연과 관계시켜 만들어낸 상황에서 인간의 오만이 드러나도록 유도한 다음, 드러난 오만을 카메라로 포착할 뿐이다.

 

총평

그리하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카메라라는, 영화의 근본으로 되돌아간다. 결국, 나는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감독의 존재를 다시 한번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전부터 생각해 왔다. 현재 일본 영화계에서 카메라의 존재를 가장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감독은 하마구치 류스케와 야마다 나오코일 것이라고. 또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바라보고 마주 보아 포착하는 것으로,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훔쳐보고 파고들어 드러내는 것으로 그 인식을 활용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을 더 높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통하여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나의 마음속에서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능력을 빠르게 뒤쫓기 시작했다. 나는 앞으로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보다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을 더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겹쳐진 우연들이 상황들과 조화되어 드러나는 결과를 촬영하는, 어쩌면 삶과도 같은 모습을 촬영하는 그의 모습도 사랑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영화는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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