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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Apr 10. 2024

수용소군도

일기에서 평론으로, 끝내 다큐멘터리


세계 문학사에 있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름은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했던 소련이라는 국가의 어둠을 낱낱이 파헤쳤으며, 끝내 그 붕괴에 일조한 작가였다. 오로지 글의 힘만으로 시대를, 체제를 고발해내어 이루어진 멸망, 그것은 예술이 가진 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수용소군도>는 그러한 힘을 여실히 드러내는 노작이자 걸작이다. 정사(正史)로부터 벗어나있던, ‘수용소’라는 변방의 외사(外史)를 홀로 집요하고 용감하게 추적한 끝에 낱낱이 밝혀내어 완성된 힘의 걸작. 우리는 그것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노작은 어떻게 걸작으로 만들어지는가? 우리는 지금부터 그 과정을 추적해나갈 것이다.


일기에서 평론으로, 끝내 다큐멘터리

<수용소군도>는 글 스스로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일기, 평론, 다큐멘터리라는 세 가지의 시점에서 우리는 <수용소군도>를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완독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시점은 융합과 함께 조금씩 좁혀진다. <수용소군도>는 끝내 ‘다큐멘터리’라는 시점의 종착역에 도달한다. 그 도달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추적해내었을 때, 노작이 걸작으로 탄생하는 순간은 생생하게 포착되리라. 여기서 잠시 되돌아가보자. ‘일기, 평론, 다큐멘터리’. 바로 여기다. 이 세 단어들은 <수용소군도>라는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세 가지 시선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을 순서로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지금부터 <수용소군도>는 ‘일기에서 평론으로, 끝내 다큐멘터리’가 되는 것이다.


<수용소군도>는 일기이다. ‘수용소’라는 시대와 체제를 살아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이 축적되어 있는 일기이다. 역사는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기억은 과거를 만들고, 과거는 역사를 만든다. 즉, 인간의 삶이(<수용소군도>의 경우에는 죄수의 삶이) 기억으로 남아 ‘일기’로서 체계화 되었을 때, 비로소 과거는 태어나고 역사는 태어난다. 여기서 두 번째 단계, ‘평론’이 태동한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기억으로부터 태어난 역사 속의 시대와 체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술한다. 그것을 우리는 평론이라고 부른다. ’수용소군도‘에는 과정이 있다. 간단히 요약해보면 체포, 형무소, 수용소, 유형, 석방, 그 이후의 순이다. 그러한 ‘수용소군도’의 그림자는, 시대와 체제는 모든 과정에거 죄수들을 옭아맨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평론을 통해 그 사실을 고발한다. 체포 중에도, 형무소에서도, 수용소에서도, 유형 중에도, 심지어 석방 이후에도 인민들에게 인간이 아닌 죄수이기를 강요하고 압박했던 어둠 속의 존재를, 평론은 환히 밝혀내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 평론은 작품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하고, 끝내 깊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이는 국가라는 존재에 있어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그중에서도 자신의 조국인 소련의 역사이자 동시에 잊혀가던 변방사인 ‘수용소군도’의 존재를 평론하여 어둠의 존재를 증명하고 밝혀내는 것으로, 후대로 하여금 과거를 되돌아보고 사유하여 끝내 반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기’로부터 탄생한 역사는 ‘평론’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융합과 함께 더욱 나아간다. 그 순간, ‘다큐멘터리’는 탄생한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기억의 총체인 ‘일기’로부터 태어난 역사와, 그에 대한 ‘평론’ 속에서 묻어나는 ‘삶의 체취’를 최종적으로 글에 담아낸다.


바로 이 지점이다. ‘일기’와 ‘평론’, 그리고 ‘삶의 체취’. 그들이 순서를 거쳐 하나로 합쳐졌을 때, 비로소 ‘다큐멘터리’는 완성되는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다큐멘터리란 실제로 있었던 어떤 사건을 사실적으로 담은 영상물이나 기록물을 말한다. 나는 여기에 ‘제작자의 의도’라는 최종적인 요소가 추가되는 것으로 다큐멘터리는 진정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수용소군도>는 다큐멘터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일기’는 역사라는 사건의 연속을 사실적으로 담고 있고, ‘평론’이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즉 ‘제작자의’ 의도나 다름 없으며, 끝내 두 시선은 그 안에서 줄기차게 묻어나는 ‘삶의 체취’, 또 하나의 사실성과 함께 융합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물이 세 번째 시선인 ‘다큐멘터리’이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이를 의도한 집필을 이어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명확한 결과가 도출된다. <수용소군도>는 다큐멘터리이다. 수많은 죄수들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여 드러나는 ‘수용소군도’라는 거대한 과정과, 그 안에서의 삶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평론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도에 맞추어 체계화한다. 그 끝에서, 이들은 융합하여 삶의 체취가 묻어나는 다큐멘터리로 거듭난다. 이것이 바로 걸작 탄생의 전말이다. 작가 본인의 경험과 수많은 죄수들의 기억 및 자료의 수집 및 정리, 그리고 명확하고 용감한 신념이 모두 합쳐져 집필된 노작은, 그 집필 과정과 끝내 완성된 결과물의 훌륭한 구조가 융합하는 과정을 거쳐 예술로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이제 글을 끝맺을 때가 왔다. <수용소군도>는 걸작이다. 문학 예술의 이해에 있어서도, 시대와 그 체제의 이해에 있어서도 <수용소군도>는 조지 오웰의 저작과 함께 필독되어야 할 저작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도록 만드는 ‘일기’이자, 그 과거에 대한 폭로로서 현재와 미래에 경종을 울리는 ‘평론’이며, 끝내 두 시선이 맡은 바를 모두 수행해내며 진한 삶의 체취와 함께 먹먹함을 남기는 ‘다큐멘터리’가 <수용소군도>라는 작품에는 담겨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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