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와 자전, 성장과 예술
나는 후지모토 타츠키의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체인소 맨>은 어처구니가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안녕, 에리>는 영화라는 사랑에 잡아먹혀 만화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작품이라고 생각했으며, 다른 단편들도 그다지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룩 백>만큼은 늘 예외로 둔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만화 <룩 백>은 그의 유일한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이라는 비극을 모티프로 하여 그에 대한 추모와 후지모토 타츠키 본인의 자전을 조화한 끝에 드러나는 성장과 예술의 의미는, 독자로 하여금 살아감의 이유를 곱씹도록 만든다. 따라서 나는 이번 글을 통하여 밝혀내고자 한다. 비극을 딛고 일어서도록 독려하는 추모를,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뒤돌아보며 긍정하는 자전을, 끝내 일어서 긍정하게 되는 성장을, 그제야 불현듯 깨닫게 되는 예술의 의미를, 그 모든 것을 총망라하여 탄생하는 삶과 그 길을.
추모: 떠난 이의 등을 바라보면서
2019년 7월 18일, 비극은 벌어졌다. 광인은 자신의 작품을 베꼈다고 주장하며 교토 애니메이션 제1스튜디오에 불을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그로부터 2년 후,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는 단편 만화 <룩 백>을 발표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독자들은 2년 전의 비극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미대생 쿄모토(京本)가 자신의 그림을 베꼈다고 주장하는 광인의 흉기에 살해당하고 마는 모습은, 교토(京都) 애니메이션의 비극과 너무나도 유사했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그러한 비극 끝에 남겨진 이가 나아가는 길을 만화라는 예술로서 그려내는 것으로, 작품 속의 희생자 쿄모토를 넘어 희생된 교토 애니매이션의 예술가들을 향하여 추모의 꽃을 헌화한다.
쿄모토에게 있어 후지노는 언제나 앞서가며 등을 내보이는 존재였다. 등교를 거부하고 히키코모리로 살던 시절에도, 함께 만화를 그리며 우정을 키워나가던 시절에도 그녀는 후지노를 자신의 이상향으로 삼아 그 등을 바라보며 좆았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후지노는 쿄모토를 향하여 읊조린다. ‘쿄모토도 내 등을 보면서 성장하는구나.’ 그러자 쿄모토에게는 꿈이 생겼다. 더 그려보고 싶어졌다. 이상향의 등을 좆다보니, 어느새 조금씩 성장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갈라진다. 하지만 쿄모토는 여잔히 후지노의 등을 바라본다. 그녀의 책장 한 켠에는 ‘후지노 쿄’의 만화 <샤크 킥>이 언제나 꽂혀있다. 그렇게 쿄모토는 바라보면서 성장해간다.
그랬던 쿄모토는 이제 없다. 만화가 ‘후지노 쿄’의 절반은 떠나가고 말았다. 후지노는 자책한다. 자신이 쿄모토를 방에서 끌어내었기에 그녀가 살해당하고 만 것이라며 비관한다. 그렇게 절망하는 후지노의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작품 속에서 줄곧 성장의 알레고리로 등장한 바 있는 ‘등’이다. 만화를 통한 두 평행세계의 간접적인 교류라는 ‘판타지 한 꼬집’ 끝에(<안녕, 에리>에서는 ’판타지 한 꼬집‘이 아예 주제로 기능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후지모토 타츠키의 작품적 정체성인 것처럼 보인다) 후지노는 등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 동시에 바라보게 된다. 서로가 각자의 길을 걷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쿄모토는 자신의 등을 바라보면서 나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후지노는 책장에 꽂혀있는 ’후지노 쿄‘의 만화 <샤크 킥>의 존재와 함께 깨닫는다. 동시에 뒤돌아보자 목도하게 된, 언제까지나 줄곧 걸려있었던 후지노의 서명이 담긴 쿄모토의 겉옷의 ‘뒷부분’, 등은 그 깨달음을 확신하게 한다.
그제야 후지노는 쿄모토의 마음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언제나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성장해왔던 쿄모토는 슬프게도 어느새 자신을 앞질러 먼 곳으로 떠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후지노의 차례이다. 후지노는 떠나간 쿄모토의 등을 바라보면서, 두 사람이 언제나 함께였음을 증명하는 ‘후지노 쿄’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나, 조금씩 좆아갈 것이다. 그렇게 살아나갈 것이다. 모티프로 되돌아가보자. 교토 애니메이션은 슬프고 끔찍한 비극을 겪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되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아간다. 떠나간 이들의 모습을 그리며 조금씩 움직임을 그려낸다. 그것은 추모이다. 먼저 떠난 이의 등을 바라보고 기억하며 조금씩 살아나가는, ‘Look Back’이다.
자전: 지나간 삶의 저편을 뒤돌아보면서
우리는 먼저 떠난 쿄모토와 그 등을 바라보고 좆게 되는 후지노의 모습에서 추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내제되어 있는 것은, 더 나아가 <룩 백> 이라는 만화 속에 내제되어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자신의 작품 속에 자신의 삶을 녹여낸 끝에 자전을 그려내었다. 후지노와 쿄모토는 그 의인화와 같다.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후지노와 미대생의 길을 걷게 된 쿄모토, 두 사람의 길은 후지모토 타츠키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자, 이전에 걸었던 길이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만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갔고, 끝내 만화가가 되었다. 어찌보면 후지모토 타츠키의 인생은 만화를 그려 팔기 시작한 시점을 전후로 하여 만화가와 미대생으로 나뉜 것이다.
<룩 백>에는 그 인생이 담겨있다. 만화가 후지노와 미대생 쿄모토. 두 사람의 이름은 합쳐져 ‘후지노 쿄’가 될 수도 있지만, ‘후지모토’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만화가로서의 자아와 미대생으로서의 자아가 합쳐진 결과로서 후지모토 타츠키라는 인물은 구성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아들은 분명하게 나뉘어 있다. 어디까지나 만화가는 현재에, 미대생은 과거에 서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뒤돌아볼 수는 있지 않을까? 후지노가 쿄모토의 방에서 뒤돌아보 쿄모토의 분신과도 같은 겉옷이 걸려있었던 것처럼, 덕분에 그녀가 슬픔의 과거를 딛고 일어서 현재를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처럼, 현재의 만화가 역시 때때로 뒤돌아보며 과거의 미대생과 마주하여 계속해서 그려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떠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뒤돌아 볼 수는 있다. 기억하고 추억할 수는 있다. 기억과 추억은 그 존재 자체가 삶의 존재와 동치된다. 떠나버렸더라도 기억되고 추억 되는 한, 존재는 불멸하여 나와 함께 살아간다. 그렇기에 먼저 떠나간 쿄모토는, 지나간 미대생으로서의 과거는 역설적으로 여전히 후지노의 뒤를 따르고, 후지모토 타츠키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 그렇기에 후지노는, 우리는 때때로 뒤돌아보아야 한다. 쿄모토의 존재가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성장해왔음을 깨달아 더욱 앞서나가며 살아나가기 위해서, 지나간 과거의 모습이 나의 일부분으로 남아 나아감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후지모토 타츠키는 그 깨달음을, 혹은 줄곧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살아감의 방식을 자신의 자전을 담은 만화로 그려내었다. 그것이야말로 지나간 삶의 저편을 뒤돌아본 끝에 아름답게 분출해내는 삶의 방식의 예술적인 증명, ‘Look Back’이리라.
성장과 예술: 때로는 길잡이, 때로는 자양분
모든 인간은 성장한다고, 나는 믿는다. 때로는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지나간 시절을 뒤돌아보면서 인간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해간다. 성장의 방향이 일방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길잡이와도 같은 존재를 좆으면서, 동시에 지나간 자양분과도 같은 존재를 뒤돌아보고 곱씹으면서 나아가기에 성장할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만화 <룩 백>은 바로 그것을 최종적으로 다루어내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예술의 의미는 드러난다. 예술은 때때로 삶과 동치되는 경우가 있다. 삶을 기반으로 예술은 충족되고, 예술은 또다른 삶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룩 백>에서는 그 역시 드러난다. 길잡이이자 자양분과도 같은 존재를 바라보고 뒤돌아보는 ‘Look Back’의 행위, 그것은 예술의 존재의의와도 일맥상통한다. 때로는 삶의 길잡이가 되어줄 작품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그랜 토리노>를 보고 살아감의 방식에 관하여 큰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깨달음을 좆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결국 예술 역시 바라봄의 대상, 이상향, 우상의 존재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한편 조금씩 축적되며 삶의 자양분으로 작용하는 작품도 있다. 사실 나에게는 예술의 존재 자체가 그러하다. 영화, 음악, 문학, 만화… 분야에 관계없이 탐미해온 예술 작품들은 조금씩 축적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는 그들을 때때로 뒤돌아보며 새로이 쌓기 위하여 나아갈 뿐이다.
때로는 길잡이를 바라보면서, 때로는 자양분을 뒤돌아보면서 이루어지는 성장과 아예 그 자체가 존재의의로 기능하는 예술. 후지모토 타츠키는 그 사실들을 ‘만화’라는 예술 속에 최종 주제로서 그려내고, 내재시킨다. 그렇기에 나는 <룩 백>이라는 작품을 만화라는 예술로서 당당하게 파헤칠 수 있다.
총평
만화 <룩 백>은 여러모로 작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모든 것을 담아낸, 혹은 쏟아낸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자신을 구성한 작품들을 제작한 교토 애니메이션을 향한 은은한 추모와, 만화가로서의 자신을 존재하도록 만든 과거의, 미대생으로서의 자신, 그들의 안에서 드러나는 성장과 예술의 진의는 어떤 삶이라도 저마다의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미대생이 되었고, 만화가가 되었으며, 그렇게 이상향의 등 뒤를 좆았고, 어느 순간 그러했던 과거를 뒤돌아보면서도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룩 백>은 그 과정에서의 성장을 예술의 의미와 동치시켜내는 작품으로도 볼 수 있다. 그 의의는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이상향을 좆아 나아가고, 때로는 삶의 궤적을 뒤돌아보며 다시금 나아간다. 그렇기에 삶은 예술이고, 예술은 삶이다. 삶은 예술의 기반이 되며, 반대 역시 그러하다. <룩 백> 은 그 사실을 가르쳐주는 작품인지도 모른다.
후기
리뷰에 개인적인 후기를 붙이는 것은 해본 적 없는 일이다. 앞으로도 할 생각은 별로 없다. 하지만 만화 <룩 백>의 리뷰를 작성하면서 들었던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여백으로 이끌었다. 나에게 있어 교토 애니메이션은 특별한 제작사였다. 그들의 작품 덕분에 나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예술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런만큼 2019년의 비극은 충격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리뷰를 쓰는 동안 TV 애니메이션 <울려라! 유포니엄 3>이 방영을 끝마쳤다. 10년 가까이 이어진 프로젝트가 비극을 딛고 종결되었다는 것에 감동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슬퍼진다. 이 작품의 마지막화에서는 먼저 떠나간 제작진들이 그려져 출연한다. 이케다 쇼코, 니시야 후토시, 키가미 요시지…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예술가들이 예술로서 등장하여 추모된다. 그제야 나는 깨달은 듯하다. 팬으로서의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결국에는 기억하며 살아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실 이 리뷰는 7월 18일, 비극의 날에 업로드하여 나 나름대로 교토 애니메이션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공고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앞선 깨달음은 나의 마음을 바꾸었다. 다른 작품에 대한 생각과 혼재되는 추모는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만큼은 예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나 스스로 먼저 떠난 이들의 등을 바라보리라. 그것이 온전한 추모이리라.
Pray For Kyoa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