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달려 나가라, 끝없이 아로새겨라
2020년대가 끝나기 전에 후루카와 토모히로 감독의 영화 <극장판 소녀 가극 레뷰 스타라이트>를 뛰어넘을 작품이 등장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 생각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야마모토 켄 감독의 영화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과 만났다. <극장판 소녀 가극 레뷰 스타라이트>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 두 작품은 화면 위에서 그려져야만 하는 이들의 운명과, 그들의 모습을 화면 밖에서 두 눈에 아로새겨야만 하는 이들의 의무를 주제로 그려내는 영화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두 작품의 행방은 갈린다. <극장판 소녀 가극 레뷰 스타라이트>가 적나라한 연출과 대사를 총동원하여 표현해 낼 수 있었던 것을,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은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리티와 '영화'의 오리지널리티를 '애니메이션 영화'의 오리지널리티라는 이름으로 합쳐내는 것만으로 가뿐하게 표현해 보이며, 끝내 이전의 걸작을 훌륭하고 뜨겁게 뛰어넘는다.
끝없이 달려 나가라, 끝없이 아로새겨라
영화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은 '최초의 영화'의 오마주로부터 시작된다. 아시는지? 최초의 영화는 말이 달리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었다. 그것이 '우마무스메' 세계관에서는 말을 의인화한 소녀들인 우마무스메의 모습으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한 오마주는 '우마무스메'의 세계관에서 '말=우마무스메'라는 공식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연출이기도 하지만, 시작에 앞서 이 작품은 명명백백한 영화라는 사실을 고함과 함께 화면 안에서 치열하게 달리는 우마무스메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관객들의 눈에 아로새겨주고 싶다는 선언과도 같이 다가온다. 우리는 그것을 인지한 채 영화를 관람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잡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과 <극장판 소녀가극 레뷰 스타라이트>는 상당히 닮아있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설정을 지닌 존재들의 운명을 표현해 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예술의 본질을 활용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끊임없이 달리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태어나는 우마무스메들의 운명은, 끊임없이 무대 위에 올라 연기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극장판 소녀 가극 레뷰 스타라이트> 속 무대 소녀들의 운명과 닮았다. 심지어 그 모습이 영화 속에 담겨버리고 만다는 점까지 닮았다. 잠시 <극장판 소녀 가극 레뷰 스타라이트>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이 영화는 주인공 '아이죠 카렌'이 '레뷰'라고 불리는 결투 끝에 '무대 소녀'라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 안에 내재된 연기의 욕망을 끝없이 되살려내고자 결심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그러한 결심의 전조는 제4의 벽을 인지하는 듯한 장면과 대사를 통하여, 즉 주인공 자신이 화면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듯한 장면과 대사를 통하여 영화의 존재와 동치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제4의 벽의 인지라는 연출을 통하여 촬영이라는 영화 예술의 본질은 드러나고, 동시에 성장해 나가는 아이죠 카렌의 모습이 촬영되어 상영되고 있음을 관객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그녀의 결심을 돋보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연출을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꼈다. 물론 지금도 매력적으로 느낀다. 하지만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이 보여준 방법론을 접하고 나서 <극장판 소녀 가극 레뷰 스타라이트>의 연출에는 맹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극장판 소녀 가극 레뷰 스타라이트>는 영화이다. 정확히는,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그렇다면 <극장판 소녀 가극 레뷰 스타라이트>가 보다 훌륭한 작품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영화의 본질인 촬영과 함께 애니메이션의 본질인 '그려냄' 역시 드러내야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면에서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은 결여가 존재하지 않는 작품이었다. 영화로서의,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애니메이션 영화로서의 본질들이 표현되고, 하나로 융화하며 끝내 우마무스메들의 운명을 표현해 낸다. 우마무스메의 운명은 달리고 싶은 욕망이다. 그렇다면 이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달리는 우마무스메의 모습 역시 치열하게 담아내어야 한다. 지금부터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영화의 본질은 촬영, 즉 카메라이고, 애니메이션의 본질은 그려냄이다(이후로부터는 애니메이팅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그렇다면 애니메이션 영화의 본질은 그 사이의 타협점이 될 것이다. 나는 그 타협점을 '애니메이팅을 통하여 카메라의 권능을 따라잡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은 그 타협점을 주제와 융화시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달리고자 하는 욕망은 '열혈'로 나타난다. 주인공 '정글 포켓'은 최강의 우마무스메로 거듭나기 위해서 달리고 또 달린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다. 작중 등장하는 모든 우마무스메들이 끝내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달려 나간다. 그것은 열혈이다. 그 모습은 전부 그려지고, 화면 속에 담긴다. 나는 몇몇 유명한 애니메이터의 이름만을 외우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작화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달리기 위하여 달리는 우마무스메들의 열혈을 담은 움직임이 전율에 가깝게 뛰어나다는 사실만큼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영화'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의 아름다움은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본질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질을 지탱하는 여러 요소들 역시 '영화'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세공되어 있다. 특히 음향과 조명을 대표적인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어떤 수단을 갈구해서라도 극장에서 관람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음향에 있다. 극장이라는 공간에서만 또렷하게 듣고 체험할 수 있는 음향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에서도 그 사실을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명확하게 울려 퍼지는 발굽소리와 숨소리가 전달하는 우마무스메들의 감정은 극장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조명은 그러한 음향과 함께 캐릭터들의 감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명암부의 조절로 표현되는, 좌절을 딛고 나아가는 '정글 포켓'의 모습과 적색으로 '아그네스 타키온'의 매드 사이언티스 기질을 드러내는 장면이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처럼 뛰어난 움직임의 표현으로 화면에 드러나는, 전율에 가까운 우마무스메들의 달리기와 이를 훌륭하게 지탱해 내는 요소들, 그들의 조화가 있었기에 우리 관객들은 작품의 아름다운 지점들을 깊게 파고들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감히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우마무스메라는 존재들이 지닌 운명의 행방뿐이다. 우마무스메는 끝없이 달려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경기장 위에 서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것은 주인공 ‘정글 포켓’의 라이벌이자 더블 주인공으로도 보이는 ‘아그네스 타키온’의 이야기이다. 아그네스 타키온은 우마무스메의 신체가 어디까지 빨리질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녔지만, 자신의 신체로는 결과를 목도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달아 달리기를 멈춘 후 동료들을 지극하여 달리도록 만드는 선택으로 자신의 연구를 지속하고자 한다. 그것은 마치 영화 속의 인물이 카메라의 존재를 쟁취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내재된 욕망이, 그로부터 파생되는 운명이 그녀에게 카메라를 쥐어주지 않는다.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내재된 욕망은 탐구심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어엿한 우마무스메로서 달리고자 하는 욕망 역시 함께 부여받아 태어난 존재이기에, 결국에는 달려야 하는 운명이기에 결코 멈출 수 없다. 그리하여 아그네스 타키온은 애초에 완전히 올라간 적도 없었던 관찰자의, 카메라의 자리에서 내려온다. 이제 그녀는 우마무스메로서 달린다. 그 모습은 똑똑히 그려져 화면 속에 담긴다. 우마무스메라는 운명이 결국 그녀들을 카메라 앞에 서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카메라 앞에서 모든 우마무스메들은 평등하다. 그렇기에 마지막 위닝 라이브에서도 명확한 승자는 등장하지 않으며, 네 명의 우마무스메들은 각자 관객들을 향하여 자신의 라이브를 보러 와줘서 고맙다고 외친다. 그 순간 관객들에게는 의무가 부여된다. 그것은 카메라 앞에서 끝없이 달려 나가는 우마무스메들의 모습을 두 눈에 아로새겨야만 한다는 의무이다.
자신들의 운명에 따라 끝없이 달려 나가는 우마무스메들은 그려지고 촬영된 끝에 극장의 스크린으로 영사된다. 그 모습을 아무도 바라보아주지 않는 것은 예의라고 말할 수 없다. 영화를 만들고 상영한다는 것은 삶의 일대기를 만들고 상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삶을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타인의 삶으로 깊이 파고들어 공감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는 그런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일대기를 두 눈에 아로새긴 끝에 그들의 삶에 공감하는 것으로 뇌리에 깊은 영향을 남기는 것 말이다. 영화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은 끝없이 달려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우마무스메라는 존재가 오르는 무대인 경기장을 카메라의 존재와 동치시켜 우마무스메들의 열혈의 감정을 담은 경주를 화면에 담아내고 상영하는 것으로, 스크린에 영사된 모든 존재를 두 눈에 끝없이 아로새겨야만 하는 관객의 의무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 의무의 행위가 남기는 영향, 그것이 우리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 영화로서 걸작이다. 카메라와 애니메이팅의 조화로 뜨겁게 완성된 영화가 스크린을 매개로 그 내외의 운명과 의무까지 뜨겁게 표현해 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