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만드는 서사의 효과
나는 이번 글에서 영화 <룩 백>의 서사적 해석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 만화 <룩 백>의 리뷰에서 이미 확실하게 시도했던 것일뿐더러, 영화 <룩 백>의 주제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서사적 해석은 그다지 의미 없는 행위 같다는 생각이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그 이유를 철저하게 파헤침과 동시에 애니메이션화 작품에 걸맞은 새로운 시선의 해석을 시도하여 어째서 영화 <룩 백>이 훌륭한 작품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오시야마 키요타카 감독의 영화 <룩 백>은 '만화의 영상화'라는 엔터인먼트의 시선에서 관람하게 된다면 그다지 좋은 평을 남기지는 못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원작 만화 <룩 백>은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에 대한 추모와 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쌓여왔던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삶의 궤적, 즉 자전이 서로 융합한 끝에 드러나는 성장과 예술을 비추고 탐구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 <룩 백>을 관람하는 58분의 시간 동안 서사적으로는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만화 <룩 백>은 철저하게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 개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추모의 이야기,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되돌아보는 개인적인 자전의 이야기, 두 이야기의 융합 끝에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성장과 예술, 후지모토 타츠키 그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깨달음을 담은 이야기를 총망라한 작품이 바로 만화 <룩 백>이다. 그것이 바로 영화 <룩 백>이 서사적으로는, 정확하게는 서사만으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작품인 이유이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긴 원작 만화 <룩 백>을 각색하여 새로이 그려낸 이야기를 스크린에 비추는 제삼자, 감독 오시야마 키요타카라는 타인의 존재가 결국 영화 <룩 백>으로부터 후지모토 타츠키 개인의 이야기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타인이 나의 이야기를 손실 없이 온전히 전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지극히 사적인 자전이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성장과 예술이 드러나고 비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과정'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 과정이란 궤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꿈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달려왔던 지난 궤적들이 고스란히 나의 눈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비로소 나는 스크린으로부터 다가오는 감정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영화 <룩 백>에서 과정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의도적으로도 다가오고, 드러나면서도 다가온다. 움직임을 그려나가는 동안 생겨나는 다양한 노이즈들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스크린에 남기는 의도적인 작법과 그려냄의 결과인 최종적인 작화라는 결과물이 나에게 감정을 전달해 주었다. 나는 바로 이들을 일종의 과정의 부류라고 생각한다. 영화 <룩 백>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애니메이터들은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리고 지웠을까. 그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나는 지난날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그림을 전혀 그릴 줄 모르지만 글은 조금이나마 쓸 줄 안다. 군에 입대하고 나서부터 나는 나의 손으로 직접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여러 글들을 완성해 내었다.
그 흔적들은 지금도 고스란히 관물대 안에 쌓여있고, 쌓여가는 중이며, 쌓여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장의 과정이다. 나는 썼고, 쓰고 있고, 쓸 것이다. 그 흔적, 궤적, 과정이 조금씩 쌓여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쌓여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끝에서 드러나는 과정의 결과물, 최종적인 작화를 지켜볼 차례이다. 나는 지금까지 영화 <룩 백>만큼 감정을 훌륭하게 그려낸 애니메이션 작품을 목도한 적이 없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나에게는 작화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평론할 전문적인 지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표정이라는 비언어적인 감정과 대화라는 언어적인 감정의 표현이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려진 후지노와 쿄모토의 감정, 그 뒤편에서 나는 애니메이터라는 예술가들의 감정과 마주할 수 있었다. 과정을 쌓아가는 동안의 감정과 끝내 전부 쌓아내었을 때의 감정, 그 모든 것이 스크린을 넘어 나에게 다가왔다.
그것이 바로 예술의 의미가 된다. 그 의미는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공동으로 집필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읽는 동안 받게 된 충격과 비슷한 것이었다. 두 저자의 저서라는 결과물 속에서 나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평전을 완성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과정들을 읽어내었고, 그 과정 역시 하나의 예술의 의미라는 사실, 충격,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영화 <룩 백> 역시 그러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책은 그 의미를 읽어나가는 행위를 통하여 은연중에, 간접적으로 깨닫게 되는 매체라는 것이고 영화는 관람의 행위를 통하여 나의 눈에 직접 아로새길 수 있는 매체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결정지어진다.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는 후지노와 쿄모토 두 사람이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된다는 서사를 중심으로 성장과 예술의 의미를 드러내고 비추었다. 이를 각색한 오시야마 키요타카의 영화 <룩 백>은 그 서사를 과정을 돋보이게 만들 효과로서 적용하고 스크린에 비추어진다.
사실 후지노는 보기보다 만화를 그리는 것을 그다지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소녀이다. 하지만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의 모습을 언제나 동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아주는 소녀 쿄모토의 존재가 있었기에 후지노는 언제나 행복하게 만화를 그려낼 수 있었다. 그 지점인 서사로부터 출발하는 노력의 과정과 창작의 과정, 그리고 끝내 완성되는 작품. 그것이 바로 성장이 되고 예술이 된다. 영화 <룩 백>은 그러한 서사를 초월적으로 적용하여 애니메이션을 그려나가는 제작진들의 과정과 동치시킨다. 그리하여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느낄 수 없게 된 만화 <룩 백>의 서사적 감동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두 플랫폼을 뛰어넘은 ‘그림’이라는 예술 그 자체로서의 감동으로 녹아들게 된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영화 <룩 백>을 원작 만화의 영상화로서 원작의 주제를 철저하게 옮겨낸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다. 원작은 애니메이션만의 이야기를 위한 요소였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으로서, 하나의 예술로서 훌륭하게 우뚝 섰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