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가레보시 Sep 26. 2024

새벽의 모든

미야케 쇼, 우연을 믿는 연출가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 <새벽의 모든>은 서사적으로 보면 평범한 작품이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두 남녀가 만나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조금씩 치유해 나가는 휴먼 영화. 하지만 그 이야기를 구성해 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새벽의 모든>은 훌륭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서사적인 시선을 배제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나의 주변에는 정신질환을 앓던 친구가 있었고(다행히도 지금은 호전 판정을 받아 잘 지내고 있다) 투병의 과정을 어느 정도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나는 정신질환이라는 병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두 남녀 주인공들이 서로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에는 상당히 공감할만한 요소가 있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 <새벽의 모든>에는 있었고, 나는 이에 더욱 이끌려버렸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그 정체를 파헤쳐보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시작하기에 앞서 그 정체를 파헤치기 위한 힌트를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미야케 쇼, 그는 우연을 믿는 연출가이다.


미야케 쇼, 우연을 믿는 연출가

오타쿠인 나는 영화의 종류를 카메라로 촬영하는 실사 영화와 움직임을 그려내는 애니메이션 영화로 독자적 구분하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만의 특징이 작화 행위라면, 실사 영화만의 특징은 촬영 행위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작화 행위는 철저히 계산되어 행해진다. 영화 <룩 백>처럼 특수한 기법이 활용된 것이 아니라면 작화는 전부 제작진에 의해 계산되어 그려진 최종본만이 스크린에 남게 된다. 실사 영화는 그렇지 않다. 물론 실사 영화 역시 여러 번의 테이크를 통해 얻어진 최종본이 스크린에 남게 되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최종본이 애니메이션 영화처럼 철저한 계산에 의하여 촬영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총체를 나는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연기자는 곧 애니메이터이다. 애니메이터는 모든 움직임, 연기를 철저한 계산에 따라 창조하고 그 결과물에 우연이 개입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사 영화에서의 연기자는 인간이며, 인간은 모두가 알듯이 우연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미야케 쇼는 바로 그 우연을 믿는 연출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실사 영화는 현실 세계를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예술이다. 물론 현실 역시 우연으로 창조되는 세계이며, 그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 역시 우연의 연속으로 살아간다. 나는 영화를 삶을 만들어내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우연의 연속으로 창조되는 세상을 촬영하는 것으로 그 위에서 태동하는 삶을 만들어내는 예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 영화는 우연을 촬영하는 예술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절대적인 방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우연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분파는 갈려버린다. 우연마저도 전부 통제하여 활용하려는 감독이 있는 반면, 자연스러운 우연마저도 영화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감독도 있다. 최근의 일본 영화감독들에 한정해 보자면 하마구치 류스케를 전자에 속하는 감독으로, 미야케 쇼를 후자에 속하는 감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야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우연은 어떻게 영화의 일부가 되는가?


미야케 쇼 감독의 전작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떠올려 주시기 바란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미야케 쇼 감독은 주인공 케이코의 모습을 롱 테이크로 촬영한다. <새벽의 모든>을 관람하기 이전까지 나는 그 이유를 언제나 길었던 케이코의 노력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롱 테이크로 그녀의 노력을 길게 촬영하는 만큼 관객에게도 그것이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며, 진정한 이유는 롱 테이크라는 기법을 통하여 우연을 촬영하고 싶었던 미야케 쇼 감독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미야케 쇼는 다큐멘터리를 오랫동안 만들었던 감독이다. 그런 감독의 과거가 <새벽의 모든>에는 발현되어 있다. <새벽의 모든>은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이 작용하는 영화이다. 우연은 그 위에서 활약한다. 다큐멘터리는 논픽션이다. 다큐멘터리의 무대는 가상의 현실 세계가 아닌 현실의 현실 세계이다. 결국 다큐멘터리에는 우연만이 가득 들어차 있다. 미야케 쇼 감독은 그것을 깨달아 픽션에도 적용하려는 것이 아닐까?


<새벽의 모든>은 다큐멘터리적으로 촬영된 영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미야케 쇼 감독은 서로를 알아가고 치유하고자 하는 두 주인공을 쫓아가면서 그 행동들을 전부 촬영하고 이어 붙여 하나의 영화로 만들어낸다. 그것은 다큐멘터리 방법론과 유사해 보인다. 하나의 주제를 정해두고 이를 쫓아가면서 촬영된 분량들을 전부 이어 붙여 만들어지는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이 <새벽의 모든>에는 적용되어 있다. 그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기라도 하듯 작중에는 모리타 과학의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자 하는 소년소녀가 등장한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도록 할까? 미야케 쇼 감독은 촬영한다. 무엇이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는데도 일단 찍는다. 롱 테이크로 길게, 인물들의 행위를 쫓으며 다큐멘터리처럼 담아낸다. 그 과정에서 우연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가령 엔딩 크레딧에서의 장면을 떠올려보면, 소년소녀가 완성한 다큐멘터리의 상영이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면서 일어나는 행위들을 미야케 쇼 감독은 롱 숏, 롱 테이크로 길게 담아내기만 한다.


그것은 물론 각본에 나와있는 행동들이고 대사들일 테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동선이 꼬여 촬영분을 버리게 될지도 모르는데도(심지어 <새벽의 모든>은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인만큼 뼈아프리라) 미야케 쇼 감독은 아무런 간섭 없이 동시다발적인 행위에서의 우연을 포착하고자 한다. 결국 미야케 쇼 감독은 우연을 믿는 것이다. 테이크마다 장면은 달라진다. 이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우연이다. 테이크마다의 우연이 장면을 보다 새롭게 만든다. 감독은 그러한 새로움들 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내어 이어 붙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서 미야케 쇼 감독은 우연이 자신의 영화를 보다 새롭게 만들어주리라고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미야케 쇼 감독은 나로 하여금 자신을 감독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감독으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영화의 거의 모든 요소에 우연이라는 자율을 부여하고 자신의 인장을 담은 촬영(필름 선호라든가 롱 테이크와 롱 숏이라든가)과 편집으로 영화를 완성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감독의 모습일 테니까.


그 모습이 결국 관객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는 점에서 영화 <새벽의 모든>은 훌륭한 작품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룩 백(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