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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Sep 26. 2024

독립시대

春來不似春


1988년, 중화민국, 혹은 대만은 완전한 민주화를 이루었고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재시대'는 막을 내리고 '독립시대'가 새로이 찾아왔다. 독립시대에서 모든 사람들은 홀로 서야 한다. 민주화라는 공통된 의식에서, 경제발전이라는 공통된 의식에서 함께한 사람들은 이제 없다. 그러나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 결국 타인에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그 공통된 의식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독립시대에서의 생존방식이다. 하지만 억지인 이상 완전할 수 없다. 결국 독립시대의 인간들은 말뿐인 말만을 내뱉으며 공통된 의식을 만들면서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심지어 나 자신마저도 믿지 못한 채로 이리저리 맴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을까. 공통된 의식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며 홀로 서게 된 인간들이 살기 위해 속고 속인 끝에 나 자신마저도 속여버리며 정신적으로 자멸해 가는 시대에서 양덕창 감독의 영화 <독립시대>는 그 방법을 코미디와 아름다운 엔딩으로 전한다.


春來不似春, 봄은 왔는데 온 것 같지 않다

앞의 서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결국 인간은 누군가가 함께 자신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존재'일 것이다. 이전의 '독재시대'에서 그 존재는 이데올로기였다. 독재일 수도 있고 민주화일 수도 있으며 양안통일일 수도 있고(하부적으로 일국양제 역시 존재한다) 대만독립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민주화 이전의 중화민국, 혹은 대만에는 저마다 공통된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누군가는 분명하게 그 이데올로기를 믿었고 어느 편에 섰든 그 편과 함께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 및 선진국화 이후 그것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민주화는 독재파와 민주파의 대립을 무너뜨렸고 선진국화는 물질주의를 보편적으로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양안통일과 대만독립 같은 거창한 설파로부터 눈을 돌려버리도록 만들었다. 그런 만큼 <독립시대>는 마치 양덕창 감독의 이전작인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에필로그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상징하는 독재시대의 끝에서 새로이 도래한 시대의 모습을 양덕창 감독은 <독립시대> 안에 담고 있다.


‘독립시대’는 도래했다. 이제 사람들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려 우정을 계산하고 사랑을 갈구하며 맴돌기만 한다. 양덕창 감독은 그 모습을 서늘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블랙 코미디로 스크린에 담는다. 분명 사랑하지만 자신을 믿을 수 없어 그 마음마저 믿을 수 없게 된 남녀와 우정을 순수하게 신용하지 못하여 과민반응하는 자의 블랙, 우정을 계산하며 모략을 꾸미는 자가 자침하고 사랑을 갈구하던 자가 눈치 없이 구차해지는 코미디. 그것은 롱 테이크로 길게 담기며 관객의 눈에 아로새겨진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독립시대에서 홀로 조금씩 침전하며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양덕창 감독은 이에 인간의 본성을 다시금 거론하면서 아름다운 엔딩과 함께 독립시대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할지도 모르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길임에도 어느새 외면해 왔던 길이기도 하고 외면하지 않았더라도 가기 두려워 피해왔던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살고 싶다면 결국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 그것은 인간이 홀로 살아갈 수 없는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결국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엔딩 장면에서 치치와 샤오밍은 헤어지고 친구로 남으려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쉬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던 것이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치치와 샤오밍은 자신의 마음을 믿으며 나아가 건물로 되돌아오고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어 서로를 껴안는다. 그것은 곧 믿어보겠노라는 다짐과도 같다. 그리하여 줄기차게 이야기한 인간의 본성은 끝내 회복되는 조짐을 보이고 영화는 끝이 난다. 그들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치치와 샤오밍의 앞날이 꽤 밝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앞날은 아직 어둠 속에 있다. 다만 양덕창 감독은 하나의 가능성만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능성을 붙잡을 것인지 붙잡지 않을 것인지를 고민하며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은 독립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인 우리이다. 하지만 본성의 존재, 그것만큼은 알아야 한다.


양덕창 감독의 영화 <독립시대>는 지극히 토착적이다. ‘독재시대’ 이후 도래한 중화민국, 혹은 대만의 ‘독립시대’를 조명하며 중국인, 혹은 대만인들은 어떻게 그 시대를 살아나가야만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그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 선택하지 않을 것인지 질문한다. 하지만 때때로 토착적인 이야기가 세계적인 보편성을 띠며 공감을 주는 때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인이다. 하지만 이 대한민국에도 독립시대는 수십 년 전부터 도래하여 이미 사람들의 마음을 침전시키고 있었다는 생각이 영화를 관람하며 들었다. 민주화 및 선진국화라는 역사도, 그 과정에서 무너진 수많은 이데올로기들도 대한민국에는 있었다. 그렇기에 <독립시대>라는 영화가 주는 감상을 나는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사람을 믿어보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나마저도 믿지 못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나는 오랫동안 침전해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믿어보려고 한다. 살아보려고 한다. 영화는 용기를 주었다. 그다음부터는 오롯이 나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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