共和, 함께 어우러지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는 깊이 분석한다면 그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문장으로 쉽게 요약할 수 있고 그러는 편이 분명하게 나은 작품이다. ‘세상이 미쳐가고 있다!’ <조커>는 이 한 문장으로 확실하게 요약할 수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세상이 미쳐가고 있다며 두려움에 떨고 경고하듯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 이유와 결과에 대하여 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고라기보다는 공허한 선동으로 남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이번 글을 통하여 영화 <조커>가 우리에게 남기는 경고를 되새기고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미쳐가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사고방식과 그것이 초래한 결과로서 드러나는 사회는 끝내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창조물은 어떻게 창조주를 파괴하고 이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넣게 될 것인가?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여야만 하고 어떻게 사회는 작동하여야만 하는가? 지금부터 나는 한 문장의 요약으로 담긴 모든 의문점의 해답을 풀어낼 것이다. 그 과정은 꽤나 정치적으로 읽힐지도 모른다.
만들어진 조커
약자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약자란 ‘힘이나 세력이 약한 사람이나 생물, 또는 그런 집단’을 말한다. 지금의 사회는 그러한 약자를 판별하는 데에 있어서 약자 개인에 집중하고자 하지 않는다. 사회는 약자를 정치적인 기준으로 판별하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인 도덕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약자는 결코 약자가 아니며, 자신의 정치적인 이상에 동조하지 않는 약자는 결코 약자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조금 더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도록 할까? 개인 역시 저마다 약자를 상대하는 방법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개인인만큼 상당히 이기적이다. 누군가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개인 대 개인의 관계는 관계가 관계인만큼 약자의 개인적인 면모 역시 쉽게 알아차려 보듬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선술했듯이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결국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 인간이다. 그 자체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만을 생각해버린 나머지 약자로 마주한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입혀버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것에 있다.
지금까지 나는 약자를 판별하고 상대하는 사회의 기준과 개인의 반응에 대하여 짧게 이야기해보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그 기준과 반응으로 인하여 만들어지게 될 ‘조커’라는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할 차례이다. 주인공 아서 플렉은 뇌 손상으로 인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이자 경제적으로는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살아가는 배경을 지닌 약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말씀처럼 모두에게 행복을 전하기 위하여 코미디언이라는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이겨내는 아서의 모습은 눈물겹다. 그러나 개인의 반응과 사회의 기준이 내리는 판별은 그를 약자 아서 플렉으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서에게는 불행만이 닥친다. 불량배와 동료의 괴롭힘으로 직장을 잃었고, 성심성의껏 모셨던 어머니는 자신이 정신질환을 앓게 된 원인이나 다름없었으며, 이외에도 불행은 줄곧 닥쳐온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아픔을 알아주지 않는다. 아서를 대하는 토마스 웨인과 머레이 프랭클린의 태도에서 그 사실은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토마스 웨인과 머레이 프랭클린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는 악인으로 볼 수 없다. 토마스 웨인은 과정에서 발언 실수 등의 잡음은 있었을지언정 고담시를 정상화하고자 하는 대의를 품은 인물이고, 머레이 프랭클린은 무대 위에서는 재미를 위하여 상대를 농락하는 모습을 보여도 무명 코미디언인 아서를 초대하고 매너있게 대하는 면모 역시 보이는 인물이다. 그러나 한없이 개인으로 파고들어가보면 이는 조금씩 무너진다. 토마스 웨인은 아서의 어머니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서의 마음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아서의 지주나 다름없는 어머니를 미치광이로 모욕함과 동시에 아서를 공격하고, 머레이 프랭클린은 자신의 쇼를 성공으로 이끌어내기 위하여 공연 도중 웃음 발작을 멈추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아서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며 그를 조롱함과 동시에 정신과 의사와 함께 초대하기까지 하며 쐐기를 박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바로 개인의 이기심이다. 평소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자신의 위신이 걸린 상황에서 인간은 결국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토마스 웨인은 아서의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묻는 아서와의 대화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서의 어머니를 정신병자라고 부르며 모욕하고 아서에게는 폭행을 저질렀다. 같은 맥락에서 머레이 프랭클린은 자신의 쇼를 성공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위신을 높이기 위하여 이전에 조롱한 적이 있었던 아서에게 출연의 기회를 주고 관중들이 즐비한 무대에 올려보내어 철저하고 교묘하게 비웃었다. 약자의 기준을 정치적으로 판별하는 사회는 그러한 개인의 이기심의 연장선상에 있다. 현실적인 기준에서 판별되고 보호받아야 할 약자가 저마다의 정치적인 기준으로 판별되는 것은 저마다가 지닌 생각이 이기심과 결탁한 결과물이고, 그들이 모이고 모여 사회가 탄생하는 것이다. 사회는 뒷면에 가려진 속사정을 이해하려들지 않는다. 자신들의 원하는 모습만을 이기적으로 볼 뿐이다. 그리하여 조커는 ‘만들어진다’. 만들어진 존재는 스스로 사고할 수 없다. 아서 플렉은 조커로 만들어져 끝내 자신의 주관을 잃고 사회의 시선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위험하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이론에 따라 혁명이 일어났고, 세계의 일부는 성평등을 이룩하여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 보부아르의 이론은 적어도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나에게는 기득권을 얻었거나 기득권과 결탁하여 변형을 거듭한 끝에 사회의 위협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조커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조커는 이기적인 개인이 모여 이룬 사회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이는 두 진영으로 양분되고, 조커는 이에 철저히 휘둘릴 수밖에 없다. 조커를 철저히 악이라고 생각하는 진영에서는 조커를 예시로 들고 비난하며 사회에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을 진압하기 위한 폭력의 도구로 만들 것이다. 또한 조커를 자신들의 대변자로 생각하는 진영에서는 그를 우상으로 만들고 집결하여 폭력을 정당화하고 사회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다. 만들어진 조커의 존재는 결국 진영과 군중에 의하여 변형되고 이용당할 뿐이다.
슬픈 점은 정작 아무도 아서 플렉이라는 존재는 보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서 플렉은 진정한 자신이 아닌 겉으로 드러나는 피상적인 모습을 이기적으로 받아들인 개인들과 그 집합인 사회에 의하여 조커로 만들어졌다. 사회는 그를 깊이 바라보아주는 듯 보였으나, 그것은 조커라는 이미지에 구속되어 있었을 뿐이었기에 아서 플렉이라는 진짜 자아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결국 조커는 하나의 악당이라기보다는 ‘현상’이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약자를 폭도로 몰아가며 진압하고자 하는 현상, 우상에 자신들을 투영하여 폭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현상. 저마다의 진영 논리와 군중 심리가 만들어낸 ‘조커’는 그야말로 질서를 위협할 현상이다. 보수주의자로서의 나는 생각한다. 폭동과 진압은 사회를 변혁시킬 세기의 대립일지도 모르나 씻을 수 없는 상처 역시 남길 것이다. 공화주의자로서의 나는 생각한다. 자유롭고 이타심 있는 개인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사회가 더욱 번영한 공동체를 만들고 이는 고스란히 개인의 행복으로 돌아올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이라도 실천하여야만 한다.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개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약자가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우리 개개인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자 우리가 살아갈 사회라는 보금자리의 유일한 운영 방법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