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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너구리 DHMO Oct 27. 2022

복닥복닥한 스펀, 등불이 아름다운 지우펀, 건조기지옥

대만유람기 2019 (8) : [2일차]

스펀十分, 하늘을 나는 천등만으로는 묘사가 부족한 마을


흔히 스펀이라고 하면 이른바 '예스진지' 투어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예류지질공원, 스펀, 진과스, 지우펀의 네 지역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네 곳은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에는 워낙에 열악한 곳에 위치해 있다 보니 택시 투어 등으로 다녀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이번 신베이 투어의 주 목적은 앞에서 이야기했던 허우퉁이었기 때문에, 허우퉁에서 기차로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스펀과 지우펀만 다녀오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허우퉁 역에서 기차를 타고 20분 정도를 가면 스펀 역이다. 그렇게 멀지는 않은 거리인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는, 기차가 보통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는데다가 철로가 깎아지른 낭떠러지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기 때문이다. 무궁화호조차도 느리다고 기피하는 경우가 많은 한국 여행객들에게 스펀역으로 가는 핑시선 열차는 걸어가느니만 못한 속도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기찻길 바로 밖이 이렇게 절벽이다.

가뜩이나 굼벵이마냥 느그적느그적 진행하는 기차가 더욱 속도를 늦추기 시작하면, 점차 차창 밖에 이색적인 풍경이 비치기 시작한다. 차량 바로 옆으로 줄줄이 늘어서 불을 밝히고 있는 각종 가게들과, 진입하는 기차 바깥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기차가 접근하는 소리에 후다닥 철로에서 몸을 피하는 관광객들이 스펀으로 처음 들어가는 이들을 맞는다. 이렇게 손바닥만한 동네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나 싶을 정도로, 스펀역 주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러고 보니 왜 하필 이름이 '스펀(十分)'인가 했는데, 역의 안내문을 읽어 보자니 '예전에 이 지역에 처음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10가구의 수를 따서' 스펀이라는 이름을 지었단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낡은 스펀역사. 하늘은 눈이 부실 만큼 맑았다.
기차만 지나가면 이렇게 다들 철로에 들어온다. 단선 철로 주위로 다닥다닥 가게들이 붙어 있다가, 기차가 들어오면 차양을 접고 모두들 썰물마냥 자리를 피한다.

하늘로 날아가는 천등.

이처럼 기찻길 바로 옆으로 다닥다닥 가게들이 붙어 있는 거리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우리라. 한국에도 이런 길이 있었을까 싶지만, 지금은 모두 안전을 위하여 정비되고 수용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그나마 비슷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라면 마포구 홍대의 구 당인리화력선 연선 구간 정도일 테지만, 그나마도 여객수송이 없던 노선이었으니 기차가 다니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온갖 가게들이 밀집해서 손님을 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선 철길 위로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들어오면, 철로 위로 차양을 드리웠던 철길변의 모든 가게들이 일제히 차양을 걷고, 기찻길 위에서 사진을 찍거나 천등을 날리는 사람들도 마치 썰물처럼 철길변 골목으로 우르르 자리를 피한다. 그 와중에도 하늘로는 매 순간 사람들의 소원을 적은 천등이 둥둥 떠올라 간다. 멍하니 지켜보고 있노라니, 아내가 옆에서 지청구를 한다. "저 많은 천등이 언젠가는 다 이 근처로 떨어져 버릴 텐데, 저거 다 환경오염 아냐?"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이다. 찾아보니 주기적으로 마을 모임에서 천등 수거를 진행한다고는 하는데,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다 싶어 나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계곡 구석구석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떨어져 있는 천등 잔해들을 보고 있자니 여러모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수많은 천등이 스펀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아름다운 물길과 스펀 폭포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스펀역에서 나와 15분 남짓 정도를 계곡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 새 스펀 폭포에 도착하게 된다. 퍽 예전에 세워진 듯한 현수교인 사광대교四廣大橋의 경관도 훌륭하고, 사광대교에서 내려다보는 계곡의 모습 또한 아름답다.

사광담 위에 걸린 사광대교.

그 위에서 바라본 수많은 돌개구멍들. 무른 바위 틈바구니에 작고 단단한 조약돌이 껴서 오랜 세월 동안 물의 흐름을 타고 바위 구멍을 깎아내어 생기는 지형이다.

사광담 근방의 작은 폭포. 이곳을 지나면 곧 관폭観瀑 흔들다리가 나타난다. 정말 많이 흔들린다.
타이완의 나이아가라라고 불린다는 스펀 폭포. 아쉽게도 관측소가 닫아서 더 멀리는 들어가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건축물을 활용한 스펀 관광센터, 이곳을 지나 조금 걸으면 가끔씩 들어오는 기차도 만날 수 있다.

슬슬 저무는 해를 등지고 스펀에서 다시 기차를 탔다. 시간이 조금 넉넉했다면 여기에서 맛있는 음식을 조금 더 먹어 보려고 했으나, 기차가 워낙 적게 들어오는 곳이라 별 수 없이 기차역 근방의 가게에서 닭고기 볶음밥만 두 명 분 사 들고 사람으로 가득한 기차에 끼어오르는 데 성공했다. 스펀은 양념한 닭고기 구이에 칼집을 내고 그 안에 볶음밥을 집어넣은 요리로 유명하기 때문에, 이것만큼은 나중에라도 꼭 먹어 보자는 요량이었다. 타이베이 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장 멀리까지 들어온 곳이기 때문에, 이제는 타이베이 방향으로 움직이면 된다. 


지우펀九分, 등불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골목


신베이시 루이팡구新北市瑞芳區의 중심지인 루이팡 역에 내린 것은 이미 해가 거의 저문 뒤였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연결편 버스 시간이 되어서, 그 버스를 타고 산길을 잠깐 달리고 나니 지우펀 시가지 입구에 도착했다. 

루이팡 역에는 밤인데도, 아니 밤이어서인지 사람이 버글버글했다. 닭고기 볶음밥은 지우펀 앞에 내리고서야 먹을 수 있었다. 좀 더 따끈따끈하게 먹었다면 눈물이 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쉽도록 맛있었다.


지우펀은 낮보다는 밤에 그 진가를 발휘하는 동네라고들 하던데, 그야말로 그 말이 딱 들어맞는 동네였다. 사방을 수놓은 붉은 등롱과 강물이 흐르듯 흘러가는 수많은 사람들, 길거리에 즐비한 가게에서 새어나오는 다양한 음식 냄새들까지, 북적북적한 상점가의 분위기가 공기 중에 가득헀다. 확실히 어느 곳에 대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더라도 평타 이상의 사진이 나오는, 분위기가 퍽 멋있는 곳이었다. 가끔씩 코를 알싸하게 찌르는 취두부 냄새가 우리를 흠칫흠칫 놀라게 하곤 했으나, 어제의 시먼딩에서 미리 예방주사 삼아 맡았던 취두부 냄새의 기억 때문인지 다행히도 견딜 만했다.

다만,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하자면, 그뿐이었다. 지우펀은 물론 아름다운 동네이긴 했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타이베이의 다른 야시장들과 큰 차이가 없는 가게 구성에 미로 같은 골목과 줄줄이 걸려 있는 붉은 등롱들로 장식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경관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올 만한 곳이기는 하지만, 그나마도 사람 많은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나 이미 다른 야시장들을 경험하고 온 사람에게라면 엄청난 감동까지는 기대하기 어려운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어디를 찍어도 그림이 된다.



건조기 지옥: 그런 일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어


지우펀에서 버스를 탈 때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는 버스마다 꽉꽉 사람이 들어차 있는 통에, 매번 버스기사 아저씨들이 탑승을 칼같이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마침내 흔들리는 버스에 입석으로 간신히 올라타고 루이팡 역에 도착했으나, 이번에는 기차가 연착이 되는 바람에 20분 남짓을 텅 빈 기차역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저녁 7시 10분쯤에 지우펀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었는데 숙소에 도착한 것은 한참이 지난 저녁 10시였다. 더운 날씨 탓에 비오듯 흘렸던 땀을 샤워로 깨끗이 씻어내고, 게스트하우스의 세탁기와 건조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빨래할 옷가지를 잔뜩 가져다가 대형 세탁기에 넣고 동전을 넣어 가동시킨 다음, 아내와 술을 한 잔씩 하며 잠시 쉬었다. 세탁기가 다 돌아갈 때쯤 아내는 자러 들어가고, 나는 세탁물을 꺼내 옆에 있는 동전식 건조기에 넣어 돌리기로 했다. 그러나 이 선택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와서 후회한들 뭐하리~ 난 바보가 돼버린걸~

생판 처음 건조기를 사용하다 보니, 건조기를 얼마나 돌려야 옷들이 전부 마르는지 나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대강 세탁기보다야 더 오래 걸리겠지, 하는 생각으로 동전을 집어넣고 대충 딴짓을 하다가 다 돌아갈 때쯤 확인을 하러 갔다. 옷은 전혀 말라 있지 않았다.

처음 써 보는 대형 세탁기와 건조기에 마냥 신기해서 찍었던 사진. 이 때는 미처 몰랐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다시 동전을 더 넣고 앞에서 돌린 만큼의 시간을 더 돌렸지만, 그것 가지고는 택도 없다는 양 옷은 여전히 축축한 그대로였다. 한두 벌이면 모를까, 각각 두 벌의 겉옷과 속옷, 그리고 수건까지 빨아 돌렸으니, 건조기를 써 본 사람이라면 족히 두 시간은 걸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겠지만 건조기 초보자인 나는 그저 당황해 쉴새없이 동전을 건조기에 투입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새벽 두 시가 되었고, 가까스로 옷이 다 마른 것을 확인한 나는 옷을 고이 개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 눈에 들어온, 세탁기 뒤에 붙어 있는 안내 문구.


"소음 방지를 위해 세탁기와 건조기는 오후 9시 이후로는 사용을 자제해 주세요."


그러니까 이 멍청이가, 애초에 세탁기도 건조기도 돌리면 안 되는 시간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렸는데, 그나마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귀중한 수면 시간을 다 깎아먹었다는 소리가 된다.

역시 사람은 사용 설명서를 잘 읽어야 어디 가서 망신당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그 소음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게스트하우스 동료 투숙객이 있다면, 그 사람이 한국말을 읽을 수 있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정중히 사과드리고 싶다.


그래도 하루의 마무리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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