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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Dec 28. 2020

즐거운 인생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남자

 그는 커튼장사 30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올 해 쉰셋이다. 동대문종합시장에 매장이 있다. 새벽 다섯 시 오십분에 일어나 라면을 끓여먹고 일곱 시가 조금 지나면 가게에 도착하는 일과를 어긴 적이 없다.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된 지 오래지만 다른 나라 얘기다. 휴일은 일요일 하루, 추석과 설 연휴 각각 사흘이 전부다. 몇 해 전 여름휴가 사흘이 추가됐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자 장사 밑천인 ‘미싱대가리’판 돈을 작명소에 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곤 그가 네 살이 되던 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의 삶을 뿌리째 흔들었다. 엄마가 일터로 나간 빈 집은 서늘했다. 마음 둘 곳 없었던 그는 밖으로 돌았다. 학교 공부엔 관심 없었다. 지원자가 미달된 야간공고에 입학했다. 학생지도 방법이라곤 체벌이 전부인 줄 아는 교사가 부지기수인 시절이었다. 각목으로 맞아 시꺼멓게 된 그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안티프라민을 바르며 엄마는 펑펑 울었다. 전기과를 졸업했지만 형광등 바꿔 달 줄도 몰랐다. 아버지가 하던 명찰가게와의 인연으로 광장시장 커튼 가게에 취직했다. 


 “첫 월급이 14만원인가 그랬어요. 장사는 해 본 적이 없으니 창고 정리하고, 원단 배달하고,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죠. 장사는 잘 됐는데 나가는 돈이 많았는지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고 나보고 물건 팔아 가져가라 하더라고요. 그렇게 했죠. 한 3년쯤 일하다 다른 데로 옮겼는데 거기 사장은 또 노름을 하더라니까.”

 

 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해도 입성에 신경을 썼다. 청바지를 다려 입고 다녔다. 바지 무릎이 나올까봐 계단도 어기적대며 올랐다. 결혼 전 칼 같은 청바지 주름을 잡는 일은 어머니 몫이었다. 아내는 다림질을 하지 않았다. 자기 전 요 밑에 바지 날을 잡아 깔아 뒀다. 다리미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입을 만 했다. 그는 지금도 뱅뱅 청바지 두 벌로 일 년을 난다.


 광장시장에서 동대문 종합시장으로, 다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상가로 자리를 옮겼다. 신도시 입주가 봇물처럼 터지던 때였다. 새집을 꾸미려는 손님들 덕에 커튼가게는 갈퀴로 돈을 긁듯 했다. 자기 장사를 할 생각은 없었을까.


 “그런 생각을 못했어요. 보증금 이천만원짜리 전셋집이 전부다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죠. 지금 같으면 어떻게든 궁리를 해서 사업을 했을 텐데. 남의 가게지만 장사가 잘 되니 그저 좋았어요.” 


 오륙년 쯤 지나 장사 보는 눈이 생기자 가게를 차리기로 했다. 처음 해보는 일은 허둥대기 쉽다. 잘못된 정보로 몫 좋은 자리를 놓쳤고, 돈에 맞춰 얻은 가게엔 손님이 들지 않았다. 손해는 고스란히 빚이 되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흘렀다. 어느 날 아침, 아내가 입을 뗐다. “가게에 무슨 일 있지? 얘기해. 당신 어젯밤 자면서 울더라고.”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고민하지 말고 털어버리자는 아내의 말이 큰 힘이 되었다. 권리금도 못 받고 가게를 넘겼다. 빚이 늘었고, 일은 계속 해야 했다. 거래금액이 큰 도매를 시작했다. 자본금이 빈약하다보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밤에 셔터 문을 내리고 ‘야반도주’를 했다.


 “그때 신용카드가 열 세 개였어요, 돌려막기 하느라고. 수첩에다 결제일 적어 놓고 날짜 돌아오면 하나씩 막는 거예요. 그거 사람 피 말리는 일이예요.”


 빚 갚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밤낮 없는 상환독촉전화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결국 파산신고를 했다. 도리가 없었다. 회복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대낮에 별을 봤어요

 건널목에서 다가오는 자전거를 못보고 걸음을 옮기다 함께 엎어졌다. 버스손잡이를 잡으려도 가늠이 안 돼 헛손질을 하기 일쑤였고, 길에서 담배 피다 옆을 못보고 무심코 팔을 휘두르는 바람에 지나가던 사람 손등에 화상을 입힌 적도 있다. 신경외과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의사라는 양반이 나보고 ‘뇌종양’이라는 거예요. 대낮인데 별이 보이더라고! 엑스레이 사진이 든 봉투를 옆구리에 낀 채 고속버스 터미널 앞 8차선 도로를 횡단했어요, 지하도를 놔두고.”


 서른 한 살이었다. 대학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았다. ‘뇌하수체종양’이었다. 시력저하와 시야감소는 종양이 시신경을 압박해서 생긴 증상이었다. 남편이 죽는 줄로만 알았던 아내는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했다.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그녀는 아는 사람한테마다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자존심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편만 살릴 수 있다면. 그는 회복했고 5년 후 다시 재발했다. 비슷한 수순이 반복됐다. 아침마다 먹는 약이 한 주먹이다. 그래도 정기검진 덕에 간 수치와 혈압 이상 여부도 알 수 있으니 술도 열심히 먹는다며 터트리던 너스레웃음 뒤로 언뜻 그림자가 스치는 걸 본 것도 같다.


 일터를 옮겨가며 종횡무진 장사를 하는 와중에도 아이들이 태어나고 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1학년이던 작은 아이에게 ‘근육종’ 진단이 내려졌다. 고환과 림프, 폐에 종양이 퍼졌다고 했다. 입원과 수술, 방사선 치료가 이어졌다. 중학교 과정 3년을 병실에서 보냈다. 중증 환아를 위한 온라인 수업 덕분에 학력인정은 받을 수 있었지만,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머리카락이 빠졌다. 모자를 쓰고 들어간 고등학교에서 아이는 적응을 하지 못했다. 학급앨범사진에서 혼자만 파란 모자를 눌러 쓴 모습을 볼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저리다.


 나쁜 일은 한밤의 공습처럼 들이닥친다. 큰 아이가 친구들과 장난치다 교문 옆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하교 길이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퇴원은 했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뇌전증’이었다. 평생 약을 먹으며 살얼음판 위를 걷듯 조심스러운 날이 남아 있다. 아내가, 방사선치료 후유증으로 고통스럽게 쏟아내는 작은 아이의 토사물을 받아내고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큰 아이 뒷수습을 하는 동안, 그는 앉아 있을 새도 없이 일을 해야 했다. 병원비는 현실이었다.      


인생이 즐거워요

 해가 지날수록 매출이 줄어드는 게 피부로 와 닿았다. 손님도 없는 가게에 아내와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밥이나 먹으러 가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블로그, 인터넷쇼핑몰 같은 단어들이 심심찮게 들렸다. 인터넷이라곤 유튜브 헬스트레이너 동영상 보는 게 전부였지만 온라인쇼핑몰을 만들어 커튼을 팔아보자고 작정했다. 이미 온라인 사업을 하고 있던 주변 상인 누구도 노하우를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대학졸업반이던 큰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실체 없는 가게를 만드는 일은 허공에 주먹질하는 것과 같았다. 되는대로 사무실을 얻고 남대문시장과 인터넷을 뒤져 촬영 장비를 들였다. 아들이 홈페이지 작업을 맡고, 그는 상품을 제작해 조달하고 판매목록을 구상한다.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처음 하는 일이라 속도가 안 나거든요. 맘은 급한데 눈에 보이는 성과는 그렇질 못하니까 답답할 때가 많죠. 시장이랑 여기 사무실까지 해서 매달 수백만 원씩 까먹고 있지만 괜찮아요, 투자거든요. 이 정도 투자는 손해가 아녜요. 바닥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이제 치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봐요!” 


 금쪽같은 아이들이 수술을 받고 후유증이 남은 데다 자신 역시 종양 수술을 두 번이나 겪었다. 의기양양하게 시작한 사업에서 망했다. 파산도 했었다. 잔잔하던 시절이 드물 정도였다. 지금은 사업을 함께 할 정도로 큰 아이의 경과가 좋아졌고, 작은 아이도 제 밥벌이를 하고 있다. 돌아보면 아득했던 날들이 언제였나 싶다. 한 달에 한 번 ‘가족 의무회식’이 있다. 평소에 함께 할 시간이 거의 없다보니 이러다 하숙집 될 것 같아 시작한 작은 행사라고 했다. 둘러앉아 먹고 떠들다보면 그간의 피로가 스르르 녹는다. 그는 “이 맛에 돈 번다.”고 했다. 인생이 무엇 같으냐는 상투적인 질문에 표정이 환해진다.


 “인생이요? 즐거운 거죠! 살면서 겪는 일들은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거예요. ‘그때 그랬구나.’ 그러면 가끔 웃음이 날 때도 있고, 울컥할 때도 있고. 재밌잖아요, 그런 게 다. 지금은 아들이랑 함께 일하는 게 즐거워요. 사업을 키울 생각을 하면 좋아요. 우리아들이 이 사업으로 탄탄해졌으면 좋겠어요, 제 꿈이에요!”


성경에 등장하는 ‘욥’이 생각났다. 시련 속에서도 신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의인의 표본이다. 주름잡은 청바지를 입고 날 것의 세상을 살아내는 그가 믿는 건 무얼까. 그럼에도 인생은 즐겁다는 낙천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시련이 때로는 낙천성을 낳는 걸까. 힘든 시간을 버티며 함께 지나온 가족에게 그 답이 있지 않을까. 미싱대가리와 바꾼 그의 이름에는 ‘이룰 성(成)’자가 들어있다. 그가 이루어 낼 것들이 궁금하다. 뭐가 됐든 ‘즐거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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