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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Oct 07. 2022

탈출 04

OT반

매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점심 먹고 출발하면 저녁 먹을 시간에 끝나는 일정.

제법 긴 시간인데 브레이크 타임도 없이 앉아 있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서 ‘벌써?’하는 아쉬움이 들곤 했다. 처음 오는 사람들, 말하자면 신입 회원들을 위한 교육이었다. 자격은 수련회에 참석했던 신참들에게만 주어진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 접근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이 삶의 기준이 되려면 온갖 의혹들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그 첫 학기를 오리엔테이션반, OT반이라고 불렀다. 신의 부르심에 따라갈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기에 앞서 맹목적으로 따라오거나 배척하지 말고 한 번쯤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라는 것이다. 그 신앙의 문 앞을 얼쩡대면서 품었던 고민이나 질문들에 관해 같이 성경에 기초해 목사님이 답을 풀어주는 것이다.

      

“이순신 형님은 과연 천국에 계실까요? 아닐까요?”

목사님은 자못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왜 굳이 선악과를 만들었나요? 어차피 먹을 거라고 다 알고 덫을 놓은 건 아닌가요?”

답을 알고 싶어 뱃속이 근질근질했다. 처음에는 궁금한 것들이 많아서 시작한 게 아니었다. 딱 한 가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지, 정민이가 말했던 ‘구원의 확신’ 같은 건 어떻게 해야 생기는 건지, 그걸 알고 싶었을 뿐이다. 공을 잘 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로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다. 운동장에 가서 직접 차 봐야 느낌을 안다. 구원의 확신도 공차기와 비슷한 건지, 꼭 토요일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어 봐야 깨닫나 보다. 이 질의응답 시간에 해결해보라는 건가? 정작 시작해보니 내 안에 궁금증들이 증폭되어 물음들이 두서없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구원과 마찬가지로 내겐 죽음도 늘 의문의 대상이었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다니며 내게 소망과 공포를 동시에 안겨주곤 했다. 누구나 죽음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고 외면한다. 잘은 모르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마저도 죽음을 죽음으로써 정면 돌파하려는 안타까운 몸짓이 아닐까 싶다. 죽을 것만 같은 삶이 너무 두려워서, 코 앞에서 어물쩍대는 죽음에 희롱당하는 것이 싫어서, 나도 선택해본 적이 있으니까. 물론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럴 만큼 용감하지도 무모하지도 않았으므로. 죽음은 그저 자연의 이치라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걸까?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까?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죽음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존재의 소멸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건가? 결국, 나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은 알 수 없는 외로움과 공허감에 시달렸다. 인간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죽음이 예약된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


이런 고민들이 중1 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려서부터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절친의 죽음이 내게 남기고 간 무거운 질문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야스퍼스의 유신론적 실존 철학과 같은 양상을 띠었던 것 같다.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해 인정하고 이를 초월하기 위해 초월자와의 관계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몸부림. 하지만 신은 형이상학적인 사유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고 죽음은 매일 구체적으로 내 앞에 마주 앉아 웃었다. 한 존재가 사라져도 세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간다. 거대한 우주적 질서에 두려움을 느꼈다. 내 존재도 먼지처럼 구석지고 흩날리고 사라질 것이다.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그럴수록 한 인간으로서, 개체로서의 '존재' 그 자체에 집착하고 싶었다.

허무감에 모든 걸 손 놓으면 죽을 방법을 찾아보게 되지만, 허무감마저 허무해서 못 견딜 지경이 되면 오히려 사는 동안은 제대로 '삶'이어야 한다는 변증법적 사고가 시작된다. 그건 언뜻 적극적인 '삶'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더욱 적극적인 '죽음'에의 과정 같은 것이다. 끌려가지 않고 내 발로 걸어가는 죽음의 길. 그게 삶의 길이고 존재의 길이다. 놀랍게도 이런 고뇌의 과정을 중1 이후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오직 홀로 감당했다. 죽음을 향한 삶의 에너지, 이건 참 외롭고 고달픈 결론이었지만, 오랜 사유의 발자국으로 굳어버린 신념이 되었다.


존재의 주체적인 의미를 정의하기 위해 내가 접근했던 건 '인간다움'이었다.

신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해석하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증명하려면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더 용이했던 것이다. '인간, 인간다움, 인간적'. 어차피 신이 지각 너머에 머물러 계신다면 차라리 '인간적' 같은 게 나쁘지 않았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표상한다. 분노라든지 집착, 질투, 우월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포함하여 한없이 이타적이고 따뜻한 마음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감정들. 또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이해하는 포용력, 더불어 자기 자신이 허물을 가질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 신과 달리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나 연약함을 귀엽게 봐주고픈 시선들. 그런 게 다 인간적이다. 인간적인 감정, 인간적인 이해, 인간적인 실수, 그리고 인간적인 '죄'. 그 모든 것들이 다 인간의 본질이고 인간 그 자체인데, 왜 '인간적'인 인간은 지양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왜 신은 인간에게 신적이기를 요청하는 것일까? 과연 인간은 신이 될 수 있을까?


죽음을 통한 삶에의 열망, 내가 가진 건 그게 전부였다.

거기에 OT반은 죄를 짊어진 인간의 구원, 더불어 개떡 같은 인생을 찰떡 같이 만들어가는 에너지,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신이 되어가는 길'을 열어줄 것만 같았다. 한 번도 신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지만, 어쩌면 내가 원했던 모든 것들이 결국 더 인간다운 길이 아니라 신이 되는 길인지도 모른다고. 노트 한쪽 귀퉁이, 골똘히 마침표를 찍은 자리에 볼펜 똥이 그대로 진하게 굳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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