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열매
첫아이 하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친가 외가 통틀어서 첫째이며 아직은 유일한 아이였고, 난임 끝에 어렵게 얻은 아이였기에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스무 살 때 학업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 서울살이를 하느라 어느새 부모님과 서먹해진 내가 그간의 심리적 거리감이 무색할 정도로 단숨에 회복된 것도 하나 덕분이었다. 친정 부모님은 부산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하나 숨소리라도 듣고 싶어 전화를 하셨고 주말에는 내가 불편할 정도로 열심히 올라와서 하나를 들여다보곤 하셨다. 시부모님은 하나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급기야 곧장 우리 아파트로 이사까지 오셨다. 전 세계의 화살표가 죄다 하나에게 꽂혀있는 것만 같았다. 그중에는 남원에서 날아온 화살표도 있었다.
하나의 이모, 내 동생 연정이었다.
그녀는 남원에서 2년째 교직 생활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나야, 이모 왔다."
하나의 첫 옹알이가 '엄마'가 아니라 '이모'였다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며 이모 연정은 매주 주말마다 경기도 일산까지 올라왔다. 하나가 나기 전에는 부모님이 계신 부산과 우리 집을 2~3주에 한 번씩 번갈아 오가며 친구들을 두루 만나 놀았다. 그런데 하나가 태어나니 더 이상 '번갈아', '두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만이 존재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일반 회사는 대부분 토요일까지 근무했으며 학생들은 매주 토요일에도 학교에 다니다가 격주 토요일에 등교하는 것으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게 격주로 '놀토(노는 토요일)'가 생긴 게 참 좋기도 했지만, 근무하는 토요일에도 오전 근무를 마치고 오후에 국토 끝에서 끝으로 내달려 일요일에 또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시로서는 꽤나 비싸던 DSLR 카메라까지 사서 나날이 달라져가는 하나를 요리 찍고 조리 찍어 주중에는 남원에서 그 사진으로 위안을 받았다. 그러나 주말에 실컷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하나를 데리고 토요일, 일요일을 모두 교회에서 보내고 돌아왔고, 집에 와서는 목욕을 시켜서 재우기 바빴기 때문에 연정이가 도무지 하나와 놀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원하지 않던 분쟁이 생겼다.
왜 거길 그렇게 가느냐, 일요일 예배는 그렇다 치고 굳이 토요일에도 꼭 가서 뭘 배워야만 하느냐, 성경을 안 배워도 하나님을 잘 믿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그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려 하느냐, 그렇게 어린 아기를 데리고 그 먼 곳까지 꼭 다녀야만 하느냐, 상식적이지 않은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상한 것임을 모르느냐, 이런 주장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와보면 안다, 얼마나 거룩하고 새로운 것들이 가득한지. 선데이 크리스천들은 모를 거라고. 조금 더 어렸을 때, 하루라도 더 젊었을 때 배웠더라면 시간과 에너지를 그렇게 방탕하게 쓰지 않았을 텐데. 그 교회가 얼마나 세심하게 사람들을 가르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는지 모를 거라고. 네 사랑 하나 존재도 이름도 다 거기서 비롯된 거라고.
그런 말이 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정이는 수련회를 거쳐 오티반에 입성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좀 알아보자. 이상한 데를 다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제대로 된 모임인지 점검해 보겠다.' 연정이는 그런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우리와 함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근무하는 토요일에는 남원에서 아무리 빨리 출발해도 오티반 시간이 끝나서야 도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티반 강의를 격주로만 들었다. 어쩌면 그게 감질나고 속상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연정이의 오티반 리더는 연정이가 어떻게든 매주 오티반에 발도장을 찍기를 권해왔다. 퐁당퐁당 건너뛰는 부분들이 나중에 복음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구멍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럴 때 우리는 생각했다. '구멍이 되지 않게 하는 게 목적이라면 못 오는 날의 강의 내용을 공유해주면 되지 않을까?'라고. 세 번 이상 결석하면 자동으로 모임에서 탈락된다는 원칙에 따라 연정이는 오티반 시작한 지 한 달 반 만에, 모임에 대한 탐정 수사를 미처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한 채 물러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마지막 출석이 아닐까 했던 토요일이 지나고 다음날 예배 때, 내 이름 앞으로 헌금이 주어졌다.
'지정 헌금'이라는 것이 있단다.
그건 말 그대로 누군가를 지정해서 그 사람의 필요를 헤아려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교회의 어떤 물품을 사들이도록 항목을 지정하기도 하고 특정 행사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교회 행사를 지정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특정 사람을 지정할 때가 많다. 누군가 어떤 게 필요해 보일 때, 주님이 주신 마음과 돈이 있다면 기꺼이 사랑하는 공동체의 지체들을 향해 나누려는 아름다운 마음을 담아 지정 헌금을 할 수 있다. 종종 지정 '헌물'이 나올 때도 있다. 신발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부러 신발을 한 켤레 사 오기도 하고, 화장품이나 학용품이 여러 개일 때 지체들을 떠올리며 무작정 나누려고 가져온다. 다만, '누가' 주었느냐는 공개하지 않는다. 스스로 밝히지 않고 드리는 게 기본이고, 혹여 자신을 밝힌다 해도 받는 사람에게는 누가 준 것인지 알리지 않는 것이다. 받는 입장에서도 특정 사람에게서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아 부담을 갖게 되지 않도록, 그것이 온전히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또 같은 마음으로 누군가를 섬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사람의 손길과 온정을 거칠 뿐, 그런 마음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그럴 수 있는 재물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니까. 건전한 방식으로 서로 돕고 주님을 기억하는 헌금, 헌물의 과정이 새삼 감동적이었다. 그런 지정 헌금이 내게로 전해졌다.
'하연정 자매님, 비행기 타고 오세요.'
주일예배에 오지 못했을 동생을 대신해 인도자인 나에게 전달을 당부하는 헌금이었다. 이십만 원이나 되는 큰돈이 그 용도가 적힌 종이와 함께 봉투에 들어있었다. 연정이가 돌아오는 토요일에 근무하고 나서 고속버스를 타면 밤에 도착할 터이니 또 오티반을 빠지게 되는데 낮에 근무가 끝나자마자 곧장 비행기라도 타고 오면 발도장이라도 찍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연정이네 리더의 강권이 떠올랐다. 누구 지갑에서 나온 돈인지 대략 짐작이 되지만 표면적으로는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고, 의도는 명확하게 알겠는데 그게 과연 그렇게까지 탈락의 위기를 모면해야 할 만큼 절박한 문제인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그리고 다다음주는, 또 그 다다다음주는? 격주마다 오는 그 위기를 누군가의 지정 헌금으로 돌려막기 하라는 건가? 큰돈을 한 자매의 출석을 위한 교통비로 쾌척한 것에 대한 감동의 크기만큼 다음번 예고된 결석에 대한 압박도 와락 엄습해왔다. 지정된 헌금을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게 비행기로 발도장을 찍는다면 격주로 오는 탈락의 위기를 억지 춘향이로 열심히 비행기로 와야할지도 모른다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강의 내용 공유가 합리적인 대안인 듯 싶은데, 왜 서로 그렇게까지 무리해야 하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발도장이라도 찍어서 간신히 행정적으로 '출석' 처리를 한다 해도 사실상 내용을 모르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대가 지불'이라고 했다.
세상은 뭐든지 '공짜'를 최고라고 한다고.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율을 뽑아낼 때 경제적이라고 한다고. 그래서 비용이 적을수록 의미있게 여기는데, 굳이 출석하지 않고도 뭔가를 얻을 수 있으면 그걸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냐고. 하지만 그런 가성비를 생각하는 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고 했다. 어떻게든 책임지고 자기가 약속한 기간 동안 애써 출석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훈련이라고. 발도장만 찍는다고 아무 의미없다고 생각하겠지만, 한번 해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안 해봤으면 말할 것도 없다고, 해봐야 아는 거라고. 연정 자매는 똑똑해서 한번 해보면 바로 알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거저 얻으려고 하지 말고 부딪혀보라고, 대가를 지불해보면 귀한 것도 분별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다른 사람을 위해 돈을 쓰는 것도, 그것마저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하는 것도, 정해진 자기와의 약속을 지켜나가려는 의지도, 그 의지가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여도 꾸준히 해내는 훈련이 된다는 것도, 무엇이든 거저 얻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도, 의미없어 보이는 일을 통해서도 주님 나라는 확장되어 간다는 것도. 지정 헌금, 대가 지불, 믿음의 길. 리더들의 주장 중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결정과 가이드가 연정이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처음 그 봉투를 전달받은 연정이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으로 표현된 마음이 너무 특별하다고 했다. 누군가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큰 관심을 느꼈다며. 누가 되었든 자신이 그토록 오티반에 탈락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 마음을 새롭게 다지게 했고, 하나의 이름으로 오가던 길에 누군가의 이름이 더해져 갔으며 그간 '어쩌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듣던 대신 '제대로 들어보자.' 하는 마음도 생겼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그 토요일 오후, 강의는 다 끝났고 그나마 오티반 팀모임을 잠시 하고 마치는 기도를 하는데 드디어 도착했던 연정이는 그날 그 기도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래서 발도장이라도 찍으라고 한 건가 싶었어. 나를 위한 기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니까. 외로움도 속임수라고, 외롭다는 감정에 속아서 아무나 만나지 말고 지체들과 말씀을 나누면서 진정한 사랑을 누리게 해달라고, 어떻게 그렇게 거룩하고 아름다운 기도가 다 있지?"
연정이는 이제 외롭지 않다고 했다.
그간 내 동생이 많이 외로웠나 보다.
그냥 집안에서 처음 보는 '아기'라서, '피붙이'라서, 흔히 이모들이 첫 조카에 그러하듯 연정이도 하나에게 열광하는 것뿐이라고 여겼다. 시골살이 볼 것도 별로 없고, 객지 생활도 낯설어서 그러려니 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가족적이고 따뜻한 학교 선생님들과 순박한 아이들, 그냥 백반집에 들어가도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12첩 반상이 나오는 로컬 맛집들로 생애 첫 독립이 원만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다 끝나가는 모임의 마지막 순간에 잠깐 출석 '인증'을 하면서 그 짧았던 기도 한 마디에 덜컥 자물쇠가 열려버릴 만큼, 연정이는 외로웠나 보다. 언니네로, 부산집으로, 주말마다 떠돌던 바람 같은 마음이 이제 딱 한 군데, 오티반과 팀모임으로 정돈되어 굳건하게 흔들림이 없는 '풍성함'으로 바뀌었다. 연정이는 그다음 근무 토요일에는 내가 '지정'한 '헌금'으로,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근무 토요일에는 자기 돈으로 비행기를 타고 기도의 끝자락에 도착하며 오티반을 마쳤다.
내 리더는 첫 열매를 잘 맺었다고 칭찬했다.
내 첫 열매는 '하나'가 아니라 '연정이'였다. 복음으로 낳은 영적인 자녀라고, 그게 '첫 열매'였다. 내 열매는 내가 생명을 가진 존재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나는 확실히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