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은 지속 반복 예외 없이
포티반이 끝나면 이름도 재미있는 포포티반이 시작된다.
포포티반은 적어도 성경공부를 1년은 꾸준히 해온 사람으로서, 이제 슬슬 '훈련'의 기본기를 시작해 볼 것인지 스스로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여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결단을 해나갈 수 있도록, 여태까지 살아온 방식에서 벗어나 거듭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배움과 훈련은 사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하지만 적어도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 훈련? 훈련한다고? 제자 훈련? 군사 훈련? 너무 싫은데?
나는 성경공부 모임을 좋아했다.
읽어도 까막눈인 성경 말씀을 환히 밝혀주는 것도 좋았고, 길고 지루한 말씀들 가운데 핵심적인 구절들만 건져 올려 하나님의 뜻을 풀어주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구원'의 길을 더듬어 나아갈 때 앞선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미로 같은 인생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내비게이션을 찾았다는 안도감이 정말 컸던 것 같다. 죽음이 두렵고 사후가 불확실했던, 그리고 오늘 이곳을 살아간다는 것이 빛 한 줌 없는 공허 속을 헤매는 것만 같았던 나에게 '방향'과 '지표'가 생겼다는 사실이 삶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훈련은 또 다른 문제였다.
'훈련'이라는 건 약간의 강제성을 내포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싫어도 해야 하고, 즐겁지 않아도 견뎌야 하는 게 훈련 아닌가? 과연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 그런 '견딤', '부득이함'을 전제해야 하는 건가? 거부감이 살짝 올라왔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부족한가? 구원에 또 다른 조건들이 하나씩 붙기 시작하는 것 같아 배신감마저 들기도 했다. 지난 1년 간의 성경공부로도 충분히 은혜로웠고 충만했다. 이제 고민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특히 갓난아기를 데리고 그 훈련이라는 걸 해야 한다면 그건 보통의 결단으로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는 결혼한 사람도 매우 적었고 아이를 낳은 사람은 더더욱 극소수였다.
포포티 리더는 오티, 포티반 때의 리더와는 달랐다.
미혼에 겉모습이 허름해 보이는 점은 닮았지만, 오티 포티반 리더들의 자상함 대신 원칙과 기준에 더 민감해 보였다. 아무래도 병아리반을 벗어나고 훈련의 시작을 선포하는 입장이다 보니 리더십의 콘셉트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리더는 내 고민이 나만의 것이 아니기에 포포티반 내내 그 문제를 다루기로 작정한 사람인 것처럼 매주 훈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자매님들의 목표가 뭐죠?
거듭나고 성장하는 겁니다. 오티 포티반 때 여러분은 거듭났어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신생아로 머물 수는 없어요. 생명이 있는 자는 성장하기 마련입니다. 무엇으로 성장하시겠어요? 신령한 젖이죠. 말씀이죠. 여러분은 여러분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훈련을 해왔어요. 매주 토요일마다 이렇게 비좁은 공간에 모여 5시간씩 성경을 공부하고 한 주간의 삶을 나눈다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거듭난 사람은 말씀을 더 알아가고 점차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걸 공감하셨다면, '말씀을 더 알아가'기 위해,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훈련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하시면 됩니다. 구원으로 자라기 위해서죠. 구원은 몇 차례 말씀드렸다시피 alredy but not yet,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셨지만 아직 우리가 삶을 통해 완성해야할 부분들이 남아있는 겁니다. 그나마도 alredy가 된 사람들이 가는 길이 훈련이에요.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니죠.
맞는 말이었다.
어쩌면 이미 훈련되었는지도 모른다. 임신한 채로, 이후엔 아기를 데리고 매주 1시간씩 자동차를 달려 한나절을 오롯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진 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경공부하는 모임 시간이 지루할 틈도 없이 어찌나 후딱 지나가는지, 훈련이라고는 해도 견딘다기보다는 즐기는 편에 더 가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훈련이 이런 거라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당장의 불편함에 주저하기보다는 영원한 삶의 궤적을 좇는 일, 거저 주신 구원의 길에 숟가락을 얹는 일, 그 시간에 집에 있어 봤자 해도 해도 적응이 안 되는 육아로 지지고 볶는 것밖에 없을 텐데, 주 1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에 대해 배우고 실천하는 것에 내가 너무 인색했던 건 아닐까, 하고.
그런 생각의 변화에는 리더의 설득보다 더 강력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목사님의 놀라운 선언 한 마디. '반쪽짜리 구원론'이었다. 훈련이 고달프다고, 세상의 가치를 좇아 살고 싶다고, 고귀한 가치를 내던져버리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셨다. 어떻게 신이 이루신 'alredy'를 인간이 'not yet'으로 흠집내거나 망가뜨리려고 하느냐고. 그런 사람은 반쪽짜리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고. 겉으로는 세례도 받고 교회도 다니지만 실제로 자기 것을 하나도 내려놓지 않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는 거라고. 설교를 듣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내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시는 것 같았다. 새삼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였는지 목사님 앞에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사후 세계의 보장만 받으면 나머지 인생은 적당히 살아도 안심이 될 것 같은 비겁한 내 믿음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가 은혜의 때이다.
잘못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는 때.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결심이 섰다. 마땅히 은혜를 입은 자답게 해야 하지 않을까? 지속 반복 예외 없는 훈련을 통해. 잘못은 돌이킬 수 있지만 훈련은 돌이킬 수 없다. 그야말로 지속적이고 반복적이고 예외가 없이 이어져 나가는 것이 바로 훈련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노빠꾸, 오직 성장만이 훈련의 진정성을 증명할 뿐이다. 생명을 가진 자, 이제 성장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