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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정 Apr 20. 2020

국내 토박이가
영어공부를 시작한 이유

제가 '진짜 영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요

  

"당연히 영어권에서 살다온 줄 알았어"


  브라질로 넘어와 함께 초급 포르투갈어 수업을 듣게 된 영국 여자애와 첫 소개를 나누었던 날. 그 친구가 해주었던 이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별생각 없이 대화를 나누다가 넌 어디에서 살다왔니-하고 묻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프랑스에서 잠깐 교환학생을 했었고 외국 생활은 이게 두 번째라고 하자 놀라며 내게 했던 말이었다. 자연스레 배웠다기 보단 자괴감과 절망을 거쳐, 노력을 통해 들은 말이라 내내 붕 뜬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23살이었을 때였나, 처음으로 종로 영어 학원에 발을 들였을 때가 생각난다. 

어릴 때부터 고대해오던 유럽 교환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교내 영어 면접이라는 관문을 거쳐야 했기에, 별생각 없이 두 달간 영어 면접만 집중적으로 연습해야지! 하고 종로행 버스에 몸을 실었던 그 날.

스피킹 반을 수강하려면 레벨별 반 배정을 위해 스피킹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사실 큰 부담감은 없었다. 딱히 영어로 말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 수능 공부한 가닥이 있는데, 토익 성적도 있는데, 기본은 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외국인이랑 대화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조금 긴장한 상태로 들어간 테스트 방에서 한 백인 여자가 나를 보고 반갑게 헬로우~를 외쳤고 나도 방긋 웃으며 헬로우~라고 화답했다.




  이 숨 막히는 15분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것도 맘처럼 되지가 않았다.

분명 알아듣기는 잘 알아들었는데 생각이 머릿속에서 한 번 꼬이고, 혀끝에서 멈추어 um... um.. 한참을 생각하고 속으로 되뇌며 어색한 웃음과 함께 내용 없는 단어들의 나열을 이어갔다. 약 15분 정도의 테스트 시간 동안 아마 5분 정도는 um 그리고 나머지 5분 정도는 오롯이 어색한 침묵의 시간으로 채워지지 않았을까. 적어도 자신감은 있어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또박또박 땡큐 쏘머치를 외치고 나와 평가 결과를 기다리던 그때 감정이 생각난다. 비록 그렇게 잘하진 못했지만, 대화는 어쨌든 이어졌으니 중간 레벨은 받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완전 오산 중 오산이었다. 

 



 내가 레벨 1이라니. 

처음에는 아 숫자가 낮을수록 높은 반인 건가 현실 부정을 하기도 했다.

수능 외국어가 쓸데없다고들 많이 하지만 그래도 1등급을 따내기 위해 투자했던 그 시간들이 내 단어, 문법 실력에 분명한 도움이 되었을 텐데 이렇게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공부였다니. 10대 내내 영어를 배웠지만 영어를 말할 수가 없다니. 나에게 상담을 해주던 직원은 별로 개의치 않아했지만 (그저 지나가는 수백 명의 예비 학생 중 하나일 테니 실은 신경조차 안 썼을 것이다.) 나는 홀로 창피함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고 이 레벨 1이라는 숫자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어쩌면, 잘못 평가를 내린 걸 수도 있어. 아니면, 내가 이런 게 처음이라 너무 긴장했을지도 모르지.


 창피함을 지워낼 합리화의 돌파구를 애써 만들어내며, 다른 학원에 가서 똑같이 스피킹 테스트를 진행해보기로 했다. 집 밖으로 나왔을 때 가졌던 나는 아마 괜찮을 거라는 그 이유 없는 자만은 지우고, 다소 두려운 마음을 안고 조금 더 심기일전하여 두 번째 학원의 테스트 방에 들어갔다. 결과는, 레벨 1이었다





 정신적 충격을 안고 돌아와 집 현관문을 열자 맛있는 저녁 냄새가 코를 찔렀고, 소파에서 티비를 보던 아빠가 인사를 건넸다.


-밥은 먹었냐? 오늘 말하기 테스트 본다던 거는 어떻게 됐어?


내게는 너무나 피하고 싶은 주제였지만, 부모님은 못내 궁금하셨나 보다. 옷 갈아입고 이따가 얘기할게요 라고 짐짓 괜찮은 듯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고, 왠지 눈물이 울컥 났다. 

-내가 이제까지 했던 영어공부는 뭐였을까, 학생 때 내리 다녔던 그 학원비들은 어디로 갔나. 내가 이제까지 너무 오만하게 살았구나. 창피하다. 창피하다. 부모님 볼 낯이 없고, 나를 볼 낯도 없다. 내가 갈 곳은 유럽이 아니라 영어 스피킹 학원이야.


자책으로 가득 찬 감정의 소용돌이가 이제 나를 원망으로 끌고 갔다.

-한국의 교육이 이래서 문제야. 이러니까 다들 한국인이 영어를 못한다고 그러지. 수능 공부만 하래서 했는데 이게 뭐야. 나는 왜 하필 수능 영어만을 전부로 알고 배웠을까. 누가 나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었나? 교육부의 잘못이지.



의미 없는 허공에 대한 원망도 관두고 한참 아무 생각 없이 자괴감에 천장을 응시하다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영어를 배워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활자 해석만 할 줄 알고, 말은 한마디 못 하는 바보가 될 수는 없었다. 


베이스는 있으니, 조금만 연습하면 훨씬 잘하게 될 거라는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나는 영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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