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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지 Mar 13. 2022

작업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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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am 12:16

생각을 덜 했던 때가 색도 느낌도 훨씬 좋은 것 같다. 유화의 부드러움을 좋아하지만 형태 위에 다른 색과 모양을 계속 쌓아 그리는 습관이 있어서 그림이 자꾸 뭉개진다. 그렇다고 아크릴을 쓰기에는 딱딱한 표현이 강해지고. 완성한 20호 몇 점을 꺼내어놓고 보니 그림이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잔하고 조용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요새 드로잉을 많이 하는데 드로잉은 페인팅보다 훨씬 고요한 느낌이 들어 좋다. 뭔가를 덧붙히려고 하는 버릇을 없애고 싶다. 터치를 많이 쓰면서 공간을 만드는 게 어렵다. 그림이 안 어려워지는 날이 올까?


pm 8:08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을 보고 왔다. 작업이 잘 안 되어서 힌트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며 천천히 둘러보았다.

특히 형태가 나눠지고 경계는 흐트러져있지만 주제가 또렷한 작품들이 참 좋았다. 한국적인 것을 더 공부하고 싶다.


3월 6일

pm 2:50

터치를 잘게 쪼개서 덧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공간이 떼어지고 나눠지려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 방법은 더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3월 7일

pm 6:23

색을 쪼개서 쌓다 보니 그림이 다시 산만해지려고 한다. 공간을 꽉 채우자니 틈이 없어져서 답답해 보이고 남겨두자니 어색하다. 가장 앞에 있는 대상과 뒤에 있는 배경 사이를 잇는 중간 부분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다.


3월 12일

pm 9:07

그동안 그림 3개를 그렸다. 서울과 대전을 왔다 갔다 하는 중에 기차에서 에스키스를 한다. 이상하게 기차에서 스케치가 더 잘 되는 듯하다. 얼른 가서 색을 얹어봐야겠다. 색도 터치도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 앞으로는 실재하는 색과 감정의 색을 섞어 써보기로 한다.

밤과 새벽의 시간 때를 그리는 게 참 좋다. 밤의 달과 별은 공평하게 빛나며 해가 떠 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헤매는 나를 잠시 숨겨주고 쉬게 한다. 나중에 밤과 새벽을 그린 그림들만을 엮어 전시해보고 싶다. 처절하게 외롭고 괴로웠지만 달처럼 은은하게 빛나던 나의 순간들.


3월 13일

pm 8:45

그림을 완성하고 제목을 붙이기가 어렵다. 어떤 때는 제목을 정하지 못해서 업로드를 하루 이틀이나 미룬 적도 있다. 가끔 아무런 말을 쓰지 않은 채로 인스타그램에 그림을 올리는 이유는 몇 시간을 꼬박 생각해도 적당한 제목이나 문구가 떠오르지 않아서이다. 무얼 그리고 싶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렸는지 상세하게 설명하는 그림이 좋은 줄만 알았는데 사람마다 각자 사유하며 감상하는 게 훨씬 더 와닿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빈 공간을 두는 것이다. 그리는 사람은 단지 진심만을 그리면 된다.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 대각선으로 긋는 선을 많이 쓰고 있다.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자세에서 나오는 터치여서인가? 뭐든 자연스럽다는 건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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