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자유,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하는 자유
이 논문의 주제는 이른바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시민적 자유 혹은 사회적 자유이다. 즉 사회가 개인에 대해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격과 한계에 관하 것이다. 69p
‘사회적 자유’ 이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그리고 밀이 말하는 사회적 자유의 핵심은 ‘개인에게 있는 자유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피해를 주게 된다면 그에 합당한 책임(경우에 따라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하는 ‘자유’이다.
서로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명시적이 법 규정에 의해서 건 암묵적인 이해에 의해서 건 권리로 간주되어야 할 어떤 특정한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178p
개인은 그의 행위가 그 자신을 제외한 어떤 사람의 이익과도 관련되지 않는 한, 그의 행위에 대해 사회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207p
타인들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행위들에 대해 개인은 책임이 있으며, 사회가 사회적 처벌이나 법적 처벌이 사회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가질 경우, 둘 중 한 가지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8p
사회나 사회 구성원들을 위해와 간섭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수고와 희생의 자기 몫을 각자 부담해야 한다. 사회는 이 조건들의 이행을 보류하라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이 조건들을 정당하게 강제할 수 있다. … 가해자는 법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여론에 의해서 정당하게 처벌될 수 있다. 179p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방종이나 무질서라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밀이 주장의 결론보다는 그 과정, 즉 논리에서 의문이 드는 점이 있었다.
밀은 ‘토론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의견 충돌과 토론을 통해서 잘못과 실수를 개선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토론의 과정에서 각자의 생각과 사상은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에 토론을 거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더 나은 결론을 도출함으로써 결국에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실수를 통해서 배운다. 토론과 합의를 통해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진리가 지닌 진정한 이점은, 어떤 의견이 진리일 때 그것은 한 번, 두 번, 혹은 여러 번 소멸될 수 있지만, 여러 시대가 흐르는 과정에서 그것을 재발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그 재등장 가운데 언젠가 한 번은 유리한 상황을 만나, 박해를 피해 마침내 그것을 억압하려는 이후의 모든 시도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전진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110p
위 구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찾는 데는 수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무신론자이다 보니 유럽의 기본적인 기독교적 사상들에 옹호적이지 않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 진리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다 보니 밀이 말하는 진리는 기독교적인 ‘절대적 진리’에 대해서도 부정할 뿐 아니라, ‘신앙’ 또는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안에서 ‘진리를 찾는 것’을 거부한다.
토론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밀의 논리는 오히려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는 의문과 질문, 토론을 거치기 위해서는 그만큼 한계 없는 생각과 사상이 필요하다. 하지만 밀의 논리 안에서 ‘기독교의 교리 또는 진리관’은 어쩌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생각과 사상의 자유에 제한을 두는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기독교의 가치와 기독교적 질서에 동의할 뿐 아니라, 이것이 나의 가치관으로 이미 형성되어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는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진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에 한정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밀의 주장과 그의 논리에 한 편으로는 동의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이 의문은 아마도 밀과 나의 가치관의 충돌이 아닐까 싶다.
관습의 전제는 모든 곳에서 인간의 진보에 대한 영원한 장애이며, 관습적인 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겨냥하는 성향, 곧 상황에 따라 자유의 정신이라거나 진보 혹은 개선의 정신이라 불리는 성향과 끊임없이 적대하고 있다. 개선의 정신은 그럴 의사가 없는 사람들에게 개선을 강압하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개선의 정신이 항상 자유의 정신은 아니다. 171p
앞에서 말했듯 밀은 무신론자였고, 기독교적 가치와는 대치되는 ‘인본주의자’이다. 그의 관점에서 유럽에 뿌리내린 수많은 관습은 기독교적인 성격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기독교에 적대적이라기보다, 이미 뿌리내린 관습 자체를 자유로운 생각과 생활의 제한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밀을 기독교에 적대적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밀의 삶이나 사상에 대해서 모를 뿐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다.)
즉, 관습을 탈피해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것을 진보라고 생각한 것은 이를 자유와 연결시킨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밀도 개선과 자유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며, 때로는 진보의 정신과 자유의 정신이 대립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러 시대를 걸쳐 진리에 대한 의견은 결국은 재발견된다는 밀의 논리는 결국 진보와 자유가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듯하다.
“… 이성의 영원불변한 명령에 의해 지식 되는 인간의 목적은, 인간의 능력들을 가장 높고 가장 조화롭게 발전시켜 하나의 완전하고 일관된 전제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쉼 없이 자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목표는 … 개성 있는 능력과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 “자유와 상황의 다양성”이 그것이다. 이것들의 연합에서 “개인적 활력과 다면적 다양성”이 생겨나고, 이것들이 다시 결합해 “독창성”이 된다. 152p
밀은 인간의 존재 목적을 개인의 능력과 발전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을 개인의 다양성과 독창성으로 연결시켰다. 즉, 인간의 존재 목적 자체가 다양성과 독창성의 실현으로 본 것이다. 밀의 관점에서 여기에 가장 방해물이 되는 요소가 관습, 특히 기독교적 관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밀의 논리는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흐름은 여러 시대를 거쳐 흘러가면서 마르크스 이념(특히 네오 맋시즘)과 PC(정치적 올바름)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누군가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양성과 독창성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철학적 기초가 정치화되어 부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려 한다는 점에서 밀의 자유론에 전적으로 동의하기에는 힘들었다.
젠더 이데올로기, 환경문제, 남녀 갈등, 인종문제 등 현시대의 많은 이념과 가치관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의 개선을 두고 ‘윤리의 문제’로 포장할 뿐 아니라 이념화(또는 정치화) 된 것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수많은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해 이념의 잣대로 ‘강압’하는 현상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밀의 논리대로 자유의 정신이 아닌데 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하는 내용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밀이 주장하는 내용이나 논리에 무엇이 문제인지 조차 인지하기 힘든 점이 있을 수도 있다.
밀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자유는 토크빌이 말한 자유와는 사뭇 달랐다. 밀의 자유는 ‘남에게 피해 주면 안 된다’는데 중점을 둔 개인주의적인 특징이 강하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현재 우리도 많이 사용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렉시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는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공동체가 잘 되어야 나도 잘된다. 즉, 공동체가 번성해야 개인의 생존, 개인의 자유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이러한 공동체 의식 안에서 서로의 자유를 존중할 뿐 아니라 서로 협력하며 당시에도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롤모델로 뽑혔다.
내가 말하는 밀의 주장에 대한 의문은 근본적인 가치관의 차이의 문제이다. 그가 주장하는 자유가 어떤 철학적 기초를 두고 있는지의 문제이고,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뿌리의 차이는 앞서 말했던 밀과 토크빌의 차이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인본주의적 개인주의인지, (기독교) 신앙적 기초를 둔 공동체주의 안에서의 자유인지의 차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원의 차이는 지금도 ‘자유’에 대해서 ‘평등’에 대해서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대립하고 있는 듯하다.